고린도전서

181028 “고린도전서(9) 교회와 세상2” (고전 6:1-4)

[설교요약]예수님은 왜 아직 안 오실까? 많은 경우, 이 질문의 배경에는 세상이 악해져 가고 우리는 그 악한 세상의 피해자라는 생각이 암시되어 있다. 과연 그럴까? 기독교가 로마의 국교가 된 후 최근까지 기독교인들은 유럽과 미국과 전세계의 지배자였다. 세상이 갈수록 악해지는 것은 기독교인들이 힘을 가지지 못해서가 아니다. 힘이 있으나 파라오의 질서를 따라 잘못 사용했기 때문이다. 예수님이 오시는 것은 파라오의 질서를 심판하시기 위함인데, 지금 오신다면 누구를 심판하셔야 할까? 예수님도 난감하시지 않을까? 종교개혁의 정신은 “아드 폰테스”(Ad Fontes), 우리 신앙의 근원으로 돌아가는 것이다. 회개하는 것이다. 개혁의 시기에는 눈을 열고 귀를 기울여 주님의 계시를 얻기에 힘써야 한다. 복음을 알기에 힘쓰고, 그 복음에 비추어 자신과 교회를 철저히 성찰하자.

181021 “고린도전서(8) 교회와 세상” (고전 6:1-4)

[설교요약]삼권분립이 이루어지지 않은 고대사회에서 재판은 통치 행위였다. 그래서 누가 누구를 재판한다는 것은 그 사람을 다스림을 의미한다. 비울은 그리스도인들 간의 소송을 사회 법정으로 가져가는 것을 심각한 문제로 진단하는 이유가 그것이다. 그래서 본문은 단순히 재판이라는 구체적 사례를 넘어 교회와 세상의 관계라는 좀 더 큰 주제로 우리를 이끌고 간다. 세상의 일상에 하나님의 주 되심을 이루기 위해 우리는 먼저 중립적 의미의 “세상”을 긍정해야 한다. 그러나 그것은 동시에 부정적 의미의 “세상,” 즉 파라오의 질서에 대한 저항이 되어야 한다. 그리스도인이 세상에서 선한 영향력을 행사하여 하나님의 주 되심을 이루고자 할 때, 그 리더십의 모델은 그리스도이다. 이제는 지식이 아니라 첫 걸음의 결단이 필요할 때이다. 실천으로 문제를 찾고 그 문제를 풀어나가자.

181014 “고린도전서(7) 하나님의 자리” (고전 3:5-9; 엡4:12-13)

[설교요약]그리스도인의 성장은 각자의 개별적인 성장일 뿐 아니라 모든 사람이 지체가 되어 함께 이루어가는 그리스도의 몸의 성장이기도 하다. 또 그 성장은 각 지체의 성장일 뿐 아니라 지체들 사이의 관계의 성장이기도 하다. 관계는 사람과 사람 사이에 있을 뿐 아니라 그 사람의 존재 속에도 있다. 그래서 교회의 성장은 관계의 성장이다. 그런데 이 성장은 우리의 수고와 노력만으로 이루어지지 않는다. 생명을 창조하시고 그 생명을 자라게 하시는 분은 하나님이시기 때문이다. 하나님께서 교회에 들어와 친히 일하시고 우리를 성장시키시도록 우리의 존재를 내어드려 하나님께서 일하실 자리를 만들자.

181007 고린도전서(6) 영에 속한 공동체 (고전 2:12 – 3:4)

[설교요약]성령께서 교회를 세우셨다. 이 말은 교회의 본질이 그리고 교회가 교회 될 수 있게 하는 동력이 성령 안에 있다는 뜻이다. 하나님은 초월자이시나 성령을 통해 교회의 현실이 되신다. 예수 사건은 과거에 일어났지만, 성령을 통해 그것이 오늘의 사건이 된다. 본문에서 바울은 고린도 교회로 하여금 영에 속한 공동체가 될 것을 촉구한다. 영에 속한 공동체란 세상의 영을 받지 않고 하나님의 영을 받은 공동체이다. 영에 속해 있음을 판별하는 기준은, 영적 능력이나 기능이 아니라, 오늘의 삶이다. 고린도 교회에는 문제들이 있었다. 그러나 성령은 그 문제들을 새로운 공동체의 기회로 삼으신다. 끊임없이 우리 자신을 내어 드려 성령의 지혜와 능력을 공급받는, 영에 속한 공동체가 되자.

180930 고린도전서(5) 부르심을 보라! (고전 1:26-28)

[설교요약]“부르심”(소명)이라는 말은 보통 사명과 관련하여 사용되지만, 본문에서는 우리를 불러 그리스도의 몸, 즉 교회를 이루게 하심을 가리킨다. 하나님은 “육신의 기준”으로 보아 어리석은 사람들, 힘 없는 사람들, 신분이 낮은 사람들을 부르셨다. “세상의” 약한 것들, 비천한 것들, 멸시받는 것들, 그래서 사회적 존재감이 낮은 사람들을 말이다. 그 기준으로는 감사하기 어렵다. 그러나 하나님의 부르심을 볼 때, 우리의 약함은 강함이 되며 우리의 어리석음은 진정한 지혜가 된다. 우리는 더 이상 이 세대의 기준으로 스스로를 판단하지 않는다. 그 때 우리에게는 감사할 일들이 너무 많아진다.

180923 고린도전서(4) 십자가의 지혜 (고전 1:18-21)

[설교요약]고린도전서의 윤리적 권면은 복음, 곧 십자가의 말씀에 근거한다. 문제의 핵심은 십자가의 말씀을 떠난 것이고, 문제 해결의 시작은 그 복음으로 돌아가는 것이다. 하나님은 십자가를 통해 믿는 이들을 구원하셨으나, 사탄은 그 지혜에 이르지 못했다. 사탄은 유대 지도자들과 로마 총독 빌라도를 움직여 예수를 죽였고, 그로써 하나님의 아들을 제거한 줄 알았겠지만, 그것은 오히려 하나님께서 죽음의 권세를 무너뜨리시는 방법이었다. 하나님께서 이 세대의 지혜를 어리석게 하신 것이다. 고린도 교인들이 이 세대의 지혜에 끌린 이유는 고린도의 시대적 산물인지도 모른다. 그것은 오늘 우리에게도 적용된다. 십자가의 말씀이 지혜가 되느냐 아니면 어리석은 것은 되느냐, 그것은 우리의 선택에 달려 있다.

180916 고린도전서(3) 하나 됨의 의미 (고전 1:10-18)

[설교요약]하나 됨이 다 좋은 것은 아니고 다 옳은 것도 아니다. 어떤 하나 됨이냐가 중요하다. 교회의 하나님의 근거는 우리가 그리스도의 한 몸을 이루고 있다는 사실이며, 그 목표는 우리가 그리스도의 몸으로서 함께 성장하는 것이다. 하나 되는 가장 좋은 방법은 말하기보다 서로에게서 듣기에 힘쓰는 것이다. 하나 됨의 범위도 중요하다. 개교회를 넘어 보편적 교회로서 하나 되어야 한다. 최근 여러 장로교단들이 한국기독교장로회의 임보라 목사를 이단 또는 이단성이 있는 것으로 결정했다. 안타까운 점은 보편적인 교회로서 기준을 세우지 못하고 있다는 것이다. 예수님은 세리와 죄인의 친구이셨음을 기억하자.

180909 고린도전서(2) 받은 좋은 것 (고전 1:4-9)

[설교요약]신약 시대 고린도는 번영의 도시, 기회의 도시였다. 해협과 지협이 교차하는 지리적 위치 덕에 고린도는 국제무역의 중심지로서 큰 번영을 누렸을 뿐 아니라, 2년마다 열리는 이스트무스 제전이 수많은 관광객을 끌어들였다. 물을 비롯하여 자원이 풍부하고 행정 제도와 군사적 안전을 포함하여 모든 것을 갖춘 완벽한 도시였다. 수많은 사람들이 고린도로 몰려들었고, 엄청난 고용과 소비가 창출되었으며, 갑작스러운 성공과 실패가 낯설지 않았다. 그런 분위기 속에서 자슈성가한 고린도 사람들은 자부심이 강했을 것이다. 아마도 많은 다양성과 차이를 포함하는 고린도 교인의 구성과 그들의 강한 신념은 분열과 분쟁의 원인이 되었을 것이다. 바울은 그들을 향해 그 모든 것이 하나님의 은혜로 주어진 것이며 그들은 아직 완성되지 않은 과정적인 존재임을 강조한다.

180902 고린도전서(1) 그리스도의 코이노니아 (고전 1:1-9)

[설교요약]교회는 그리스도의 몸이다. 이 말은 그리스도께서 오늘 교회를 통해 현존하신다는 뜻이기도 하다. 우리가 지체로서 한 몸인 교회를 이룰 때 그리스도께서 그 몸에 임재하시고 교회를 통해 우리를 만나 주시는 것이다. 교회는 그리스도의 코이노니아이다. 그리스도의 몸의 지체로서 우리가 서로 나누는 코이노니아이며 동시에 교회에 임재하신 그리스도와 나누는 코이노니아이기도 하다. 또한 그것은 예수 그리스도의 주 되심에 참여하여 그 주 되심을 함께 이루는 것이다. 그래서 그리스도의 코이노니아는 교회의 정체성이자 사명이기도 하다. 교회는 홀로 존재하는 것이 아니라 그리스도의 몸인 공교회의 일부로 존재한다. 고린도교회의 문제는 상당 부분 공공성을 상실한 데 기인한다. 한국교회도 그렇다. 공교회 됨을 회복하자.

주일 예배 안내

2024년 3월 31일 오전 11시

설교자: 안용성 목사

본문:   누가복음 24:1 – 12

제목:   누가복음(39) 부활이 시작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