로마서

180415 로마서(31) 국가의 순기능

[설교요약]바울은 그리스도인들에게 국가에 무조건 복종하라고 요구하지 않는다. 데살로니가전서 5장 3절에서, 바울은 평화와 안전을 외치는 자들에게 종말 심판이 갑자기 임할 것이라 경고하는데, 그들은 바로 평화(pax)와 안전(securitas)을 선전 구호로 삼았던 로마 제국이다. 로마서 13장은 이 맥락에서 읽어야 한다. 바울은 비록 로마 제국이 종말 심판의 대상이 될 파라오의 질서를 대변하지만, 로마를 그 자체로서 파라오의 질서와 동일시하면 안된다고 말하는 것이다. 왜냐하면 국가는 양면성이 있기 때문이다. 데살로니가전서가 국가의 부정적 측면을 말한다면, 로마서 13장은 긍정적 측면으로서 허나의 이상적인 국가를 그리고 있는 것이다. 국가는 하나님으로부터 옳고 그름을 판가름하는 권한을 위임 받았다. 그러나 더 많이 받은 자에게는 더 많은 책임을 요구하신다. 로마 제국은 그 책임을 다하지 못했기에 종말 심판의 대상이 될 것이다.

180408 로마서(30) 파라오의 질서를 분별하자

[설교요약]하나님의 나라는 눈에 보이는 모습으로 오지 않는다. 그러나 이 말은 하나님의 나라가 현실 너머 저 멀리 어딘가에 있다는 뜻이 아니다. 하나님의 나라는 ‘너희 가운데,’ 즉 우리가 살아가는 현실 속에 있기 때문이다. 현실에 있으나 표층이 아니라 심층에 있기 때문에 보이지 않는 것이다. 파라오의 질서도 마찬가지이다. 사탄은 저 멀리 신화적 세계에 존재하는 것이 아니라, 현실의 심층에서 현실을 움직인다. 그러므로 파라오의 질서로부터 자유로운 사람은 아무도 없다. 돈이나 권력이나 명예나 학식을 더 많이 가진 사람일수록 말이다. 그러나 파라오의 질서는 눈에 보이지 않는다. 그러므로 사람이나 시스템을 파라오의 질서로 오인하면 안된다. 사람은 사랑할 대상일 뿐이다. 하나님의 나라도 그와 같다. 하나님의 나라는 실천 프로그램으로 구체화되어야 하지만, 실천 프로그램과 동일시 될 수는 없다.

180401 로마서(29) 부활을 살자 (롬 13:11-14)

[설교요약]시간은 우리에게 의미를 가지고 다가온다. 하루의 순간들이 우리 인생의 시간들이 제각기 독특한 의미를 가지고 있다. 성경은 인류의 역사에도 그런 때가 있음을 보여준다. 그것은 하나님께서 인류 역사에 개입하셔서, 파라오의 질서를 끝내시고, 하나님의 주 되심을 온전히 이룰 때이다. 본문은 그것을 밤이 지나고 아침에 오는 것에 비유한다. 그러므로 잠에게 깨어날 때가 되었다는 것이다. 11절에서 ‘깨어나다’로 번역된 헬라어 동사 ‘에게이로’는 바울서신에서 거의 예외 없이 부활을 가리키는 일종의 전문 용어이다. 그리고 바울은 대개의 경우 이 동사를 ‘죽은 자들로부터’라는 수식어와 함께 사용한다. 에베소서 5:14는 같은 동사를 사용하여 ‘죽은 자들로부터 일어나라’고 권면한다. 종말에 일어날 부활을 앞당겨 지금 부활을 살라는 것이다. 어둔 밤으로 경험되는 오늘의 현실 속에서 부활을 살아가자.

180311 로마서(28) 원수를 갚지말라 (롬 12:9-21)

[설교요약]파라오의 질서와 하나님의 뜻을 분별하라. 하나님의 뜻은 사랑이다. 사랑은 율법의 완성이다. 그 사랑의 대상은 원수에게까지 확장되어야 한다. 원수와 파라오의 질서는 구별되어야 한다. 선과 악의 이분법은 심층 현실 또는 가치의 영역에 적합한 것이며, 표층 현실에 적용되어서는 안된다. 파라오의 질서는 궁극적으로 하나님의 진노, 즉 종말심판에 놓이게 될 것이다. 그러므로 원수를 갚는 일은 하나님께 맡겨두고 기다려야 한다. 그러나 나와 원수지간인 사람은 사랑으로 변화되어야 할 대상이다. 이것은 사회변화를 위한 노력을 부정하지 않는다. 단 변화의 방법을 재고하도록 요청할 뿐이다.

180304 “로마서(27) 너 자신을 알라” (롬 12:3-8)

[설교요약]윤리적 권면을 담은 로마서 제4부의 전반부(12-13장)는 이 세대를 분별하라는 권면으로 시작해서 이 세대의 종말이 가까웠다는 말로 끝맺음으로써, 우리로 하여금 파라오의 질서와 하나님의 뜻의 분별에 주목하게 한다. 그 첫 권면은 먼저 눈을 안으로 돌려 나의 분수를 알라는 것이다. 이 분수는 출생과 계급에 정해지는 것이 아니며, 소유의 획득의 기대치로 측정되는 것도 아니다. 그것은 하나님께서 각 사람에게 나누어주신 믿음의 척도에 따라 인식되는 것이다. 믿음의 척도에 따라 자신을 아는 것은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주신 은혜의 선물, 곧 은사를 아는 것이다. 은혜를 아는 자는 파라오의 질서에 끌려가지 않는다. 나를 아는 것이 하나님의 뜻을 분별하는 첫 걸음이다.

180225 로마서(26) 삶의 복음 삶의 예배 (롬 12:1-2)

[설교요약]로마서 12장 1-2절은 로마서 제3부(12:1-15:13)의 윤리적 권면을 ‘거룩한 삶의 예배’로 요약한다. 우리의 예배는 주일에 시작되어 다음 주일까지 한 주간 삶을 통해 계속되는 것이다. 그러기 위해 우리는 이 세대(파라오의 질서)를 본받지 않고 마음을 새롭게 함으로 변화되어야 한다. 변화됨으로써 비로소 우리는 하나님의 선하시고 기뻐하시고 완전하신 뜻을 깨달을 수 있다. 이 윤리적 권면은 하나님의 나라의 복음 안에 이미 들어있는 것이다. 그래서 복음과 윤리는 하나이며, 예배와 삶도 하나이다. 그 윤리적 실천은 하나님의 자비하심, 즉 지속적으로 도우시는 은혜로 인해 가능하다. 이 점은 2절의 두 주동사가 수동태 명령법으로 쓰였다는 점으로도 뒷받침 된다. 하나님 나라 복음을 믿는 믿음의 실천은 하나님의 주 되심에 우리의 존재를 내어드리는 수동태의 실천이다. 은혜로 사는 것이다.

180211 “로마서(24) 끊을 수 없으리라” (롬 8:28-39)

[설교요약]구원의 확신은 성도의 견인 교리와 관련된다. 성도의 견인 교리와 예정론은 하나님의 절대 주권을 강조한다. 그러나 성경은 그와 함께 인간의 자유의지를 말하기 때문에 두 원리 사이에서 균형을 이루는 것이 중요하다. 극단적인 형태의 성도의 견인 교리와 이중예정론은 그 균형을 잃어버리고, 성경을 교리에 가두는 경향이 있다. 그 경우 기독교 신앙은 천국 자동판매기로 오용될 수 있다. 또 하나님을 하나님의 절대주권이라는 원리에 가두게 될 수 있다. 구원이라는 선물보다 선물을 주시는 하나님께 집중해야 한다. 답이 교리에 있지 않고 하나님께 있기 때문이다. 우리가 하나님을 사랑하고 하나님이 우리를 사랑하시는, 그 관계에 답이 있다.

180128 로마서(23) 구원의 확신 (롬 8:17-18, 26-27)

[설교요약]십자가 속죄의 복음을 통한 구원의 확신은 현실의 빈틈을 만들어 낸다. 서구에서는 그 빈틈을 학교의 윤리교육이 채웠으나 한국에서는 기복신앙이 그 자리를 차지했다. 그러나 로마서에는 그런 빈틈이 없다. 예수를 영접함으로 다 되는 것이 아니라, 그 후에도 성령에 이끌려 살아가는 사람이 하나님의 자녀이기 때문이다(롬 8:14). 그리스도와 함께 영광을 누리기 위해 그와 함께 고난받고 있다는 사실이 우리가 하나님의 자녀임을 입증한다(롬 8:17). 성령은 구원의 완성을 향해 나아가는 우리 안에 내주하셔서 하나님의 주 되심을 이루도록 도우실 뿐 아니라, 그로 인해 고난이 따를 때, 그 고난을 이길 힘도 주신다(롬 8:26-27).

주일 예배 안내

2024년 4월 21일 오전 11시

설교자: 안용성 목사

본문:   누가복음 22:24 – 27

제목:   교회의 기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