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도행전

160410 십자가의 필연과 인간의 책임

[설교요약] 사도행전은 반복하여 예수의 십자가 죽음이 하나님의 뜻과 미리 아심 가운데서 이루어진 일임을 강조한다. 그렇다면 그를 죽인 사람들은 그저 구원의 드라마에서 누군가는 맡아야 할 약역을 담당한 것에 불과하지 않은가? 그렇지 않다. 사도행전은 예수를 죽인 사람들의 책임을 강조하며, 반복하여 회개를 촉구한다. 십자가의 필연과 인간의 책임이 서로 모순되는 것처럼 보이는 이유는 우리가 역사 속에서 하나님의 주권과 함께 작용하는 다른 주체들을 고려하지 않기 때문이다. 그것은 하나님께 적대하는 파라오의 질서와 둘 사이에서 선택해가는 자유의지를 가진 인간이다. 파라오의 질서를 선택한 자들이 예수를 죽인 것이다. 찬송가의 한 대목을 떠올려 본다. “거기 너 있었는가 그 때에?”

160327 다시 사신 주님을 믿습니다

[설교요약] 기독교 신앙은 본질적으로 부활 신앙이다. 왜냐하면 복음이란 예수의 주 되심인데, 예수로 하여금 온 세상의 주님이 되시게 한 결정적 사건이 바로 부활이기 때문이다. 부활은 단지 다시 살아나는 것이 아니라, 죽을 수 밖에 없는 우리의 몸이 죽지 않는 몸으로 변화되는 것이다. 예수님은 부활하심으로 파라오의 질서의 근원적 무기인 죽음의 독침을 해제하셨다. 우리를 지배하는 죽음의 능력은 이제 해체의 수순에 들어갔고, 주님 다시 오실 때, 죽음의 지배는 완전히 종식되어 우리도 부활할 것이다. 그리하여 하나님의 나라가 완성될 것이다. 그래서 사도 바울이 이렇게 선언하는 것이다. “죽음아, 너의 독침이 어디 있느냐?” “그리스도께서 죽은 자 가운데서 다시 살아나사 잠자는 자들의 첫 열매가 되셨도다!”

160320 세상 속의 교회

[설교요약] 사도행전 1-7장은 유대인들의 이야기이다. 같은 유대인들 가운데에도 입장과 배경을 달리하는 다양한 그룹이 있었는데, 교회는 그 그룹들과 서로 다른 방식으로 관계를 맺어 나갔다. 외적으로, 교회는 파라오의 질서를 대변하는 적대적인 지도자들과 싸우며, 다른 한 편으로, 중립적 위치에 있는 ‘백성’의 마음을 얻기에 힘썼다. 내적으로, 교회는 문화적 언어적 배경이 다른 히브리파와 헬라파의 차이를 인정하고, 생존이 위태로운 과부들을 보살폈으며, 피해자 중심으로 문제를 해결해 나갔다. 교회는 문화적 차이에 대한 감수성과 함께 사회적 약자들과 공감하는 능력을 가져야 한다.

160313 예수의 자리에서

[설교요약] 예수께서 하나님의 주 되심을 거부하는 유대지도자들과 대립하시고 그들에 의해 십자가를 지신 것처럼, 사도들도 예수를 죽은 바로 그 지도자들과 대립했다. 그 대립의 핵심은 하나님의 주 되심이었다. 예수는 그들을 향해 누가 그들의 주님인지 선택하도록 촉구했다. 그래서 그들의 존재가 가이사의 것이면 가이사에게 돌려주고 하나님의 것이면 하나님께 돌려드리라고 말이다. 예수의 이름으로 말하지 말라고 겁박하는 그들을 향해 사도들도 같은 방법으로 응수하였다. 우리가 하나님께 복종하는 것이 옳은지 산헤드린 권력에 복종하는 것이 옳은지 판단하라고 말이다. 그리고 그들은 예수의 길에 동반되는 고난을 기꺼이 선택했다. 이렇게 예수를 위해 선택한 고난을 가리켜 십자가라 한다.

160306 예수의 이름으로

[설교요약] 사도행전에 담긴 사도들의 사역은 복음서에 담긴 예수의 사역 패턴을 따라 진행된다. 예수의 사역의 주제는 하나님의 나라였다. 예수는 하나님의 나라를 말로 선포할 뿐 아니라 행동으로 보여주셨다. 사도들도 하나님의 나라를 말로 선포할 뿐 아니라 능력으로 보여주었는데, 그 능력의 매개가 된 것이 ‘예수의 이름’이다. 사도들이 예수의 이름으로 말할 때 그곳에 능력이 나타났다. 부활하신 예수의 주 되심이 현실로 이루어진 것이다. 예수의 이름은 주문이 아니라 예수의 주 되심의 실천이다.

160228 교회의 정의

[설교요약] 베드로는 오순절 설교에서 하나님 나라의 복음을 선포했다. 그리고 청중에게 회개를 촉구했다. 그 촉구에 반응한 사람들은 ‘이 비뚤어진 세대,’ 즉 파라오의 질서를 벗어나 이 세상에 하나님의 주 되심을 이루어 가는 교회를 세웠다. 그 교회는 주일과 교회당이 아니라 ‘날마다’와 ‘집집이’로 규정되는 일상의 생활 공동체였으며, 은둔형 공동체가 아니라, 세상을 변화시키는 대안 공동체였다. 사도행전의 교회는 무엇보다도 돈으로부터의 자유를 실천함으로써 하나님 나라의 모델이 되었다. 그러한 하나님의 나라 생활 공동체를 멀리 내다보며 한 걸음을 내디딜 때이다.

160214 부활의 증인

[설교요약] 베드로의 오순절 설교는 땅 끝까지 예수의 부활의 증인 됨이 무엇을 의미하는지 보여주는, 증언의 모범이다. 그 설교의 요지는 하나님께서 예수를 다시 살리셔서 우리의 주님이 되게 하셨다는 것이다. 이처럼 부활을 증언하는 것은 다시 사신 예수의 주 되심, 곧 하나님의 나라를 증언하는 것이다. 그 하나님의 나라를 우리는 어떻게 증언할까? 예수께서 그리하셨듯이, 하나님의 나라를 말로 선포할 뿐 아니라, 예수의 주 되심을 이루는 우리의 삶으로 증언해야 한다. 그것은 혼자의 힘으로는 불가능하고, 공동체로서 함께 할 때 가능하다. 교회가 하나님의 나라 생활 공동체가 되어야 한다.

160207 땅 끝으로!

[설교요약] 오순절 성령 강림 사건은 사도행전 1:8의 첫 성취이다. 성령이 제자들에게 임하여, 그들이 다른 지방 언어(방언)로 말하는 능력을 받고, 전 세계 열 다섯 지역에서 온 사람들에게 열 다섯 지방 언어로 (땅 끝까지) 하나님의 큰 일을 증언한 것이다. 하나님의 나라와 로마 제국은 땅 끝까지 확장되기를 추구한다는 점에서 유사하다. 그러나 제국은 모든 사람을 제국의 언어로 통일하여 지배하려 하는 반면 하나님의 나라는 지방 언어, 즉 땅끝의 언어로 그 사람들을 섬긴다. 제국의 본질은 권력과 부의 집중이다. 그러나 하나님의 나라는 땅 끝까지의 확산, 즉 나눔과 섬김이다.

160131 변화된 공동체를 상상하자

사도행전 1장에는 다락방에 모여 성령 강림을 준비하던 사람들의 이름이 나온다. 이것은 개국공신들의 목록이 아니다. 오히려 그것은 십자가가 두려워 전열을 이탈했다가 돌아온 탈영병들의 목록이다. 그리고 그 가운데는 아예 돌아오지 않은 사람도 있었다. 하나님은 그 사도들의 이름을 하나씩 불러 다시 일으켜 세우신다. 그리고 열두번째 사도를 새로이 선택하신다. ‘사도’를 뜻하는 헬라어 아포스톨로스는 ‘보낸다’는 뜻의 동사 아포스텔로에서 온 것이다. 교회는 그렇게 세상에서 실패하고 돌아온 서로의 이름을 불러 일으켜 주고 서로를 다시 세상으로 파송하는 공동체, 즉 사도 공동체이다.

160124 기도하며 상상하자

사도행전의 제자들이 공동체로서 처음 한 행동은 기다림이었다. 그리고 그 기다림의 표현이 기도였다. 그 기다림의 기도는 누가-행전 전체에 일관되게 나타나는 기도를 반영한다. 누가복음에 담긴 예수님의 기도는 사도행전에 담긴 제자들의 기도의 모범이 되는데, 그 기도를 통해 하나님은 당신의 뜻을 계시하시고, 기도를 통해 친히 그 뜻을 이루어 가신다. 우리의 기도 역시 하나님의 뜻을 아는 계시의 기도가 되어야 하며, 그 기도를 통해 하나님이 친히 일하시게 하는 내어드림의 기도가 되어야 한다. 그 기도를 한 마디로 요약하자면 이것이다. “주의 뜻이 이루어지이다!”

주일 예배 안내

2024년 4월 21일 오전 11시

설교자: 안용성 목사

본문:   누가복음 22:24 – 27

제목:   교회의 기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