요한복음

220410 요한복음(40) 예수의 수난과 죽음 (요18-19)

[설교요약]요한복음의 예수 수난 이야기는 공관복음에 없는 정보들을 더하여 독자들의 질문에 대답해 준다. 그것은 왜 예수의 적대자들이 예수를 붙잡기 위해 가룟 유다의 배반이 필요했는지(18:2), 유대 지도자들은 왜 스스로 예수를 죽이지 않고 빌라도의 힘을 빌리고자 했는지(18:32)와 같은 질문들이다. 예수의 적대자들은 밤에 예수의 은신처를 급습하여 유월절이 이르기 전에 감쪽같이 예수를 제거했다. 그러나 요한복음은 그 때가 바로 유월절 양을 잡는 시간, 예수의 때였다고 말한다. 어린양이신 예수는 왕으로서 죽음의 세력을 멸하셨다. 그러나 바로 그 시간 유대인 지도자들은 오직 로마 황제가 그들의 왕이라고 고백했다. 수난주간을 시작하며 그들의 모습에 우리를 비추어 본다.

220403 요한복음(39) 진리로 거룩하게 하소서! (요17)

[설교요약]고별설교의 마지막 장인 요한복음 17장에는 예수께서 제자들을 위해 드리신 기도가 담겨있다.이제 예수님은 세상을 떠나시지만 제자들은 세상에 있다. 그런데 제자들은 세상에 있으나 세상에 속하지 않았다. 예수님은 그들이 하나 되길 그리고 진리로 거룩하길 간구하신다. 거룩한 삶은 종교 생활을 포함하지만 그것으로 그치지 않고 일상의 모든 삶에 관련된다. 우리는 오랫동안 일상과 분리된 신앙생활에 익숙해져 있다. 그러므로 그리스도인답게 사는 법을 배우기 위해서 신앙생활의 첫 순간으로 다시 돌아가야 한다. 예수님은 우리에게 거룩함을 명령하시지 않고 아버지께 우리의 거룩을 위해 기도하셨다. 주님께서 우리를 거룩하게 하실 것이다.

220327 요한복음(38) 참 포도나무 (요15:1~16:4)

[설교요약]이 비유에서 “참 포도나무”는 “들포도나무”와 대조되는 개념이다. 구약성경에서 들포도나무는 하나님과의 언약을 어기고 사명을 저버린 이스라엘을 상징한다. 본문에서 들포도나무는 그리스도인들을 박해하고 회당에서 출교시킨 유대인들이다. 예수님은 그들을 가리켜 “세상”이라 부르신다. 이 비유의 두 핵심 동사는 “머물다”와 “열매 맺다”이다. 예수 안에 머물 때 우리는 많은 열매를 맺게 된다. 여기서 열매는 주님 안에서 누리는 생명과 기쁨을 상징한다. 그리고 머무르는 것은 서로 사랑하는 것이다. 우리가 주님 안에 머물고 주님이 우리 안에 머물 때 우리는 사랑할 수 있게 되고 그 사랑의 기쁨을 열매로 누리게 된다.

220313 요한복음(36) 끝까지 사랑하시다 (요13)

[설교요약]요한복음 13장은 수난주간 목요일에 있었던 최후의 만찬(13-17장)의 첫 장면들을 담고 있다. 자리에서 예수께서 제자들의 발을 씻어주신 것은 단순한 겸손과 섬김 이상의 행동이었다. 그것은 그 순간에는 바로 알기 어려운 일(7절)이며 구원과 직결되는 일(8절), 곧 예수의 십자가 죽음을 상징하는 행위였다. 가룟 유다는 그 자리에서 예수를 떠난다. 제자단의 모범적인 일원이었던 가룟 유다가 왜 예수를 배반했을까? 아마도 그는 예수가 택한 죽음으로 인해 절망했을 것이다. 안타깝게도 그 절망은 사탄이 유다에게 들어가는 계기가 되었다. 그러나 다른 모든 제자들에게 절망은 예수 십자가를 통한 구원을 깨닫는 계시의 기회였다.

220306 요한복음(35) 왕을 어떻게 맞이할까? (요한12:12-19)

[설교요약]예수께서 죽은 나사로를 살리신 사건, 마리아가 예수의 발에 향유를 부은 일, 그리고 종려주일 예루살렘 입성은 요한복음에서 하나로 연결되어 있다. 유대인 지도자들은 로마 제국을 위해 예수를 제거하려 했다. 반면에 종려나무 가지를 들고 환호하는 무리는 죽은 나사로를 살려내신 능력으로 이스라엘의 독립을 얻고자 했다. 그러나 예수님은 전쟁이 아니라 전쟁을 그침으로, 죽임이 아니라 죽음으로 그의 나라를 세우시며, 그 나라는 유대인과 이방인을 포용한다. 이 세상 나라와 다른 그 나라의 왕으로 오시는 예수를 맞이하는 모범을 마리아가 잘 보여준다.

220220 죽음을 대면하심 (요한11:32-38)

[설교요약]요한복음은 예수께서 나사로가 죽은 나사로를 살리신 일은 그냥 많은 치유 사건 가운데 하나로 서술하지 않는다. 이것은 예수를 죽음으로 이끈 사건이며, 동시에 부활을 상징하는 의미심장한 사건이다. 그래서 예수는 나사로의 죽음을 단순한 생물학적 죽음으로 대하시지 않고, 더 근본적인 죽음의 현실 그리고 죽음을 통해 인간을 지배하는 사탄의 지배에 대면하신다. 그래서 이 죽음에 분노하신다. 그리고 마리아의 슬픔에 깊이 공감하신다. 우리는 모두 죽지만 주님 오시는 날 함께 부활할 것이다. 우리는 죽음에 삼키우지 않는다. 육체의 죽음은 영원한 생명으로 나아가는 통로에 불과하다.

220213 죽음과 영광 (요한11:1-8)

[설교요약]요한복음에 의하면, 예수께서 죽은 나사로를 살리신 사건이 예수의 죽음의 결정적 계기가 되었다. 하나님을 섬기기보다 제국의 관리가 되길 원하던 유대 지도자들은 예수의 영향력이 커지는 것을 로마에 대한 위협으로 보았고, “한 사람을 제거”하는 정치적 해결을 선택했다. 죽은 사람을 살려냄으로 이 땅에서 예수의 영광이 절정에 달했을 것이다. 그러나 그것이 예수를 십자가로 내 몰았다. 그런데 요한복음은 예수의 죽음을 영광의 사건으로 서술한다. 사람이 되어 가장 낮은 곳으로 내려오신 예수의 몸에서 하나님의 영광이 찬란히 빛나듯(1:14), 예수의 십자가에서 그분의 영광이 계시되었다.

220130 요한복음(31) 목자의 음성을 듣기 (요10)

[설교요약]예수님은 바리새인들과의 논쟁 중에 자신을 선한 목자로 비유하셨다. 그 배경에는 에스겔서 34장이 있다. 이스라엘의 목자들이 양을 잘 돌보지 않아 백성이 목자 없는 양과 같이 되었기 때문에 하나님께서 친히 목자가 되신다는 것이다. 예수님이 바로 그 목자이다. 선한 목자는 양들을 위해 목숨을 내놓는다. 선한 목자는 자기 양들을 잘 알고 양들도 목자의 음성을 안다. 이 비유에는 약속과 기대가 담겨 있다. 그것은 예수님이 우리의 목자가 되신다는 약속이며, 우리가 예수님의 음성을 알아듣고 친밀하게 소통할 것이라는 기대이다. 그 소통은 개인적 차원뿐 아니라 교회 공동체의 차원에서도 이루어져야 한다. 따라잡기 힘든 빠른 속도로 변화하고 있는 역사의 급전환기에서 우리는 오히려 잠시 멈추어 서서 주님을 보고 들을 필요가 있다.

220123 요한복음(30) 무엇을 보는가? (요9)

[설교요약]예수 시대 장애인들은 종교적 정죄와 사회적 차별의 대상이었다. 그 사람이 시각장애인으로 태어난 것이 자신의 죄 때문인지 부모의 죄 때문인지 묻는 제자들의 질문은 그러한 통념을 대변한다. 장애인을 단지 불행한 존재로 보며 불행의 원인을 찾아 누구를 탓하고자 하는 것이다. 그러나 그러한 시각이 장애인을 더 불행하게 만든다. 예수님은 그러한 원인론에 동조하지 않으시고 오히려 그 사람을 통해 하나님께서 하실 일에 주목하셨다. 그를 장애인으로 대하지 않고 한 사람으로 대하신 것이다. 요한복음 9장은 그 사람이 하나의 대상으로부터 주체로 변화해 가는 모습을 보여준다.

220116 요한복음(29) 진리가 너희를 자유케 하리라! (요8)

[설교요약]“너희가 진리를 알게 될 것이니 진리가 너희를 자유롭게 하리라.” 예수를 적대하던 유대인들에게 예수께서 주신 이 말씀은 그들이 지금 자유롭지 못한 상태에 있음을 전제한다. 그들은 로마의 속국의 지도자들이면서도 스스로 자유롭다 여겼으며, 자신들의 죄의 지배 아래 있음을 깨닫지 못했다. 자유란 우리의 뜻이 예수 그리스도의 진리와 일치되어 가는 과정에서 성숙한다. 그런 점에서 우리의 신앙생활은 온전한 자유에 접근해가는 과정이고, 우리는 자유로워져 가는 존재이다.

주일 예배 안내

2024년 3월 31일 오전 11시

설교자: 안용성 목사

본문:   누가복음 24:1 – 12

제목:   누가복음(39) 부활이 시작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