창세기

201018 창세기(15) 선과 악의 지식 (창 2:9,16-17; 3:4-5, 22-23)

[설교요약]선악과의 히브리어를 직역하면 “선과 악의 지식의 나무”이다(창 2:9, 17). 선과 악의 지식이 무엇일까? 아담의 범죄로 인해 악이 세상에 들어왔다(롬 5:12). 그 전에는 오직 선만 있었다. 그래서 아담에게는 모든 것이 허용되었다(2:16-17). 완전한 자유이다. 그러나 악이 세상에 들어옴으로 선은 이제 악과 싸워서 얻어내야 하는 무엇이 되었다. 그 결과는 곤고함과 죽음이다(롬 7:24). 이렇게 사람을 죽이는 선과 악의 지식, 곧 정죄하고 죄책감으로 짓누르는 지식은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 사람을 살리는 선과 악의 지식으로 변화된다. 그것을 하나님의 주 되심을 확장하며 사람을 자유롭게 한다.

201004 창세기(14) 하나님이 왜 선악과를 만드셨을까 (창 2:8-9,16-17)

[설교요약]하나님이 왜 선악과를 만드셨을까? 창조 이야기에 담겨 있는 두 주제, 곧 “창조세계의 자율성”과 “사람의 특별함”을 배경으로 답을 찾아보자. 창조세계에는 자연법칙이 있어서 모든 것이 스스로 저절로 돌아간다. 그러나 자연이 스스로 판단하고 결정하는 것은 아니다. 사람의 특별함은 스스로 선택한다는 데 있다. 이것이 선악과이다. 하나님은 다른 피조물에게는 아무것도 요구하지 않으신다. 오직 사람에게만 선악과를 주시고 선택을 요구하신다. 선택은 자유를 의미하고, 자유에는 책임이 따른다. 창조세계에는 네 종류의 힘이 작용한다. ①창조주이신 하나님, ②자유의지를 가진 사람, ③자연법칙, 그리고 ④사탄이다. 이 네 힘을 정확히 읽어내고 그 가운데서 하나님의 뜻을 분별해 내야 한다.

200927 창세기(13) 너희가 하나님처럼 되리라 (창 2:16-3:24)

[설교요약]창세기의 에덴 동산은 요한계시록의 새 예루살렘과 닮은 점이 많다. 무엇보다도 둘은 초월과 내재가 만나 하나 된 시공간이라는 점에서 서로 통한다. 새 예루살렘은 하나님의 하늘이 인간의 땅으로 내려와 이루어진다. 에덴은 이 땅에 있으나 이 땅 위에 존재하지 않는다. 이렇게 인류 역사의 처음과 끝에 초월과 내재가 만나는 지점이 있고 그 사이에 인류 역사가 있다. 뱀은 하와에게 선악과를 먹으면 너희가 하나님처럼 되리라고 유혹했다. 그러나 아담과 하와는 이미 하나님과 같은 존재였다. 하나님 없이는 우리가 하나님처럼 될 수 없다. 하나님과의 관계의 파괴는 사람 사이의 그리고 사람과 자연 사이의 샬롬의 파괴로 나타났다. 새 예루살렘은 에덴의 회복이다. 그리고 거기에는 사람의 참여가 요구된다.

200920 창세기(12) 가까이서 돕는 자 (창 2:18-25)

[설교요약]창세기 둘째 단락의 중심 주제는 관계이다. 그 가운데 본문은 사람과 사람의 관계를 다룬다. 본문은 남자와 여자의 구별이 이루어지기 전 “사람”에 관해 말한다. “남자”라는 말이 나오는 것은 23절 이후이다. 따라서 본문은 모든 사람의 이야기로 읽어야 한다. 하나님은 사람이 혼자 있는 것이 좋지 않아 “가까이서 돕는 자”를 만드셨다. 돕는다는 말은 사람 사이의 우열 관계를 말하지 않는다. 오히려 이 말은 사람은 누군가의 도움 없이는 살 수 없는 존재임을 보여준다. 아담의 갈비뼈로 하와를 만드셨다는 것은 하와가 아담에게 종속되었을 말하지 않는다. 땅의 흙으로 사람을 만들었다는 말이 사람이 땅에 종속되었음을 의미하지 않듯이 말이다. 하나님의 창조는 사람이 서로 도움으로 완성된다.

200913 창세기(11) 에덴을 경작하다 (창 2:15)

[설교요약]노동은 인간의 타락에 대한 벌로 주어진 것이 아니다. 사람은 처음부터 일하는 존재로 창조되었다. 하나님은 사람과 땅과의 협력을 통해 2장 5-6절의 불모지를 에덴으로 바꾸시고, 사람으로 하여금 에덴을 경작하게 하셨다. 타락 이전 에덴의 노동은 종의 고역이 아니었다. 그것은 거부하는 땅을 억지로 개간하여 길들이는 일이 아니라 땅이 그 생명력을 마음껏 발휘할 수 있도록 돕는 창조적 노동, 친환경적 경작이었다. 어미소와 함께 멍에를 멘 새끼소의 일과 같은 것이었다. 에덴의 노동은 놀이와 같았을 것이다. 오늘날 일은 돈벌이의 수단으로 전락했고, 일의 규모와 보수가 사람의 존재를 결정하는 것처럼 오해되고 있다. 그러나 일을 통한 존재의 실현은 일을 통해 완성되는 하나님의 창조 섭리 속에서 이루어지는 것이다.

200906 창세기(10) 에덴과 네 개의 강 (창 2:8-14)

[설교요약]에덴으로부터 네 강이 발원했다. 둘은 메소포타미아 지역을 이루는 티그리스와 유프라테스이다. 비손과 기혼의 위치는 분명하지 않으나, 성경의 정보를 따르자면 구스를 둘러 흐르는 청나일 강과 백나일 강을 말하는 것일 가능성이 많다. 창세기는 인류의 양대 문명을 이루는 젖줄기가 모두 에덴에서 발원하고 말하는 것으로 보인다. 그러나 앞의 두 강과 뒤의 두 강은 전혀 다른 곳에서 발원하여 반대 방향으로 흐르고 서로 만나지도 않는다. 창세기를 바로 이해하기 위해서는 과학적-역사적 사실만이 진실이라는 실증주의의 프레임을 벗어날 필요가 있다. 에덴의 네 강은 에스겔서와 요한계시록에 나오는 종말의 생명수 강과 닮았다. 창조와 종말은 역사의 양극단이지만 둘다 시간의 초월이라는 점에서 같은 지점이다. 인류 문명사의 위기를 맞이한 지금 에덴으로 돌아가 거기에서 다시 시작하자.

200830 창세기(9) 하나님과 사람과 땅 (창 2:4-7)

[설교요약]창세기의 첫 단락(1:1-2:3)이 온 우주의 창조를 거시적인 규모로 그리는 반면에 둘째 단락(2:4-3:24)은 미시적으로 에덴이라는 한 장소에 거기에 사는 두 사람을 클로즈업해서 보여준다. 첫 단락에서 땅이 지구 표면 전체를 가리키는 반면에 둘째 단락은 흙으로 이루어진 땅, 경작지로서의 땅에 초점을 맞춘다. 땅은 하나님의 도움과 사람의 협력을 필요로 하는 존재이다. 사람은 땅의 흙으로 지어진 존재이며 동시에 하나님께서 코에 생명의 기운을 불어넣으신 존재이다. 이렇게 하나님과 땅과 사람 사이에서 맺어지는 온전한 관계가 샬롬이다. 사회적 거리두기가 인간관계에는 많은 제약을 주지만, 땅과 하나님과의 관계를 회복하는 좋은 기회로 삼을 수 있다.

200823 창세기(8) 거룩한 시간의 창조 (창 2:1-3)

[설교요약]성전이 파괴되고 거룩한 땅으로부터 뿌리뽑혀 바벨론 포로가 됨으로써 유대인들은 근본적인 신앙의 위기를 맞이하였다. 그러나 그들은 거룩한 공간의 종교를 거룩한 시간의 종교로 바꾸는 신앙의 패러다임 전환을 이루었다. 창세기의 창조 이야기에서 그 단면을 읽어낼 수 있다. 하나님의 창조는 여섯째 날에 끝난 것이 아니라, 일곱째 날에 거룩한 시간의 창조와 함께 마무리 되었다. 하나님은 모든 일에서 손을 떼고 쉬심으로 그 날을 거룩하게 하셨다. 다시금 공간의 위기를 맞이한 오늘 우리의 온라인 예배는 우리가 모든 일에서 손을 떼고 예배에 집중함으로써 거룩한 시간으로 창조될 수 있다.

200712 창세기(5) 다스림의 사명 (창 1:14-19,26-28)

[설교요약]넷째 날 하나님은 해와 달과 별들을 창조하시고 낮과 밤을 나누는 사명을 주셨다. 낮과 밤을 나눈다는 말은 하나님께서 둘째 날 이미 나누어 놓으신 낮과 밤, 곧 시간을 알리는 표시가 된다는 뜻이다. 여섯째 날 하나님은 사람을 하나님의 형상(쩰렘)으로 창조하시고 창조세계를 다스리는 사명을 주셨다. 모든 창조세계의 주님이 하나님이심을 알리는 표시로 사람을 지으신 것이다. 산상수훈에 담긴 하나님 나라의 윤리는 우리가 세상의 빛이라는 말씀으로 요약되는데, 이는 우리가 어떤 태도로 하나님의 주 되심을 이루어야 하는지를 보여준다. 여름 한낮에 찬란하게 작렬하는, 그러나 사람들이 피하는 태양이 되기보다 동토를 녹이고 생명을 품어주는 따뜻한 봄볕이 되어보면 어떨까?

200705 창세기(4) 하늘이 존재하는 이유 (창 1:6-8,14-19)

[설교요약]창조 이야기는 고대의 우주관을 토대로 서술되었다. 돔 경기장의 천장과 같은 반구형의 궁창에 해와 달과 별들이 박혀 있다. 그 궁창 위에 물이 있어 때로 창문을 통해 비나 눈이 내린다. 과학은 시대적인 것이며, 언어와 문화와 함께 하나님의 진리를 계시하기 위해 사용하시는 그릇일 뿐, 그 자체가 성경이 말하고자 하는 진리는 아니다. 그러므로 성경을 과학 교과서로 읽으면 안된다. 창세기는 “무로부터의 창조”를 말하지 않는다. 창세기의 관심사는 물질의 창조가 아니기 때문이다. 그것은 혼돈으로부터 샬롬의 창조이다. 우리가 하늘의 창조에서 배우는 것은 허공에도 뜻이 있다는 것이다. 창조는 채움이면서 동시에 비움이다. 샬롬은 채워짐이기도 하고 비워짐이기도 하다.

주일 예배 안내

2024년 3월 31일 오전 11시

설교자: 안용성 목사

본문:   누가복음 24:1 – 12

제목:   누가복음(39) 부활이 시작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