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무엘상

151122 사무엘상(13) 예언자 아비가일

[사무엘상 25:30-33-12] 다윗은 사무엘기상이 말하는 지도자의 두 덕목, 즉 (1) 하나님과 소통하는 능력과 (2) 하나님 편에 서는 믿음을 갖춘 사람이었다. 다윗과 아비가일의 이야기를 그것을 보여주는 한 사례로 읽을 수 있다. 나발의 홀대에 분개하여 자신의 전 병력을 이끌고 출동하는 다윗. 아비가일은 마초의 살기가 가득한 메마른 들판에 피어난 한 송이 꽃과 같았다. 그녀는 하나님을 대신하여 다윗에게 묻는다. “다윗, 네가 누구인지 잊었느냐?” 그리고 다윗은 그 말을 하나님의 말씀으로 알아듣는다. 우리도 하나님의 음성을 듣는 귀를 훈련하자.

151115 사무엘상(12) 다윗이 왕이 되기까지

[사무엘상 26:10-12] 왕이 되기까지 다윗의 삶은 처량하고 고통스러운 피난살이의 연속이었다. 그는 육백명에 이르는 부하들과 그들의 아내와 아이들까지 이끌고, 한 편으로 사울을 피해 다니며, 다른 한편으로 가족들을 먹여 살리며, 피난살이를 이어가야 했다. 그 가운데 다윗은 사울을 죽일 기회가 두 번이나 있었지만, 두 번 다 사울을 순순히 살려 보냈다. 그것은 왕을 세우고 폐하는 것이 전적으로 하나님의 소관이라는 믿음에서 나온 것이었지만, 이스라엘 열두 지파를 통합하기 위한 정치적 고려이기도 했다. 다윗은 지략과 능력이 뛰어난 사람이지만, 그것으로 왕이 되려 하지 않고, 하나님이 친히 개입하실 때까지 기다리고 기다렸다. 그것은 그가 미래로부터 하나님의 눈으로 스스로를 바라볼 줄 아는 믿음을 가졌기 때문이다.

151108 사무엘상(11) 골리앗 식별하기

[사무엘상 17:45-47; 에베소서 6:12] 이 설교는 다윗과 골리앗 이야기를 하나의 알레고리로 해석한다. 우리가 현실에서 맞서는 상대는 블레셋이다. 그러나 블레셋과의 싸움은 표면일 뿐이고, 본질은 골리앗과의 싸움에 있다. 골리앗은 거대한 파라오의 질서가 우리 안에 내면화된 것이다. 많은 경우 골리앗을 무너뜨리면 블레셋도 무너지지만, 그렇지 않은 경우도 있다. 예수님은 로마 제국이라는 블레셋에 의해 죽임 당하셨다. 그러나 그것은 로마의 배후에 있는 골리앗과 싸우는 방법이었다. 우리의 믿음은 때로 골리앗을 무너뜨리기 위해 블레셋에 대한 패배를 감수하는 것이다. 그러나 항상 지는 것은 아니다. 하나님이 모든 것을 합력하여 선을 이루시기 때문이다.

151101 사무엘상(10) 주께서 하고자 하시면

[사무엘상 18:12-16, 로마서 8:28] 사무엘기상의 후반부(16-31장)에서, 사울과 다윗의 운명은, 한 사람은 추락하고 한 사람은 상승하면서, 서로 대조되어 나타난다. 사울은 백성들 사이에서 다윗의 신망이 높아지는 것을 두려워하여 그를 제거하려 한다. 표면적으로는, 사울이 가해자이고 다윗이 피해자였다. 그러나 사울 주변의 많은 사람들이 다윗을 지지한 반면 사울은 외톨이였다. 그리고 무엇보다 하나님이 다윗과 함께 계셨다. 그래서 사울은 가시 채찍을 뒷발질하는 신약성경의 사울(행 26:14)과 같았다. 사울 왕이라는 현실권력의 방해에도 불구하고 하나님은 모든 것을 합력하여 선을 이루신다. 하나님께서 하시고자 하면 어느 누구도 막을 수 없다. 그리고 하나님께서 막으시면 어느 누구도 이룰 수 없다.

151025 사무엘상(9) 은혜의 역사

[사무엘상 16:11-13] 다윗은 이스라엘의 영웅이자 메시아의 표상으로서, 그리고 평범한 가정에서 태어나 이스라엘의 성군이 된 역전의 드라마를 통해, 우리의 동일시를 자아낸다. 그러나 구약성경의 역사는 다윗의 부정적인 모습을 숨기지 않는다. 왕들의 잘못을 미화하지 않고 오히려 그 잘못을 낱낱이 드러내는 것이 구약성경의 역사 서술 방식이기 때문이다. 그것은 이스라엘 백성의 이야기를 하나님의 은혜와 선택의 역사로 기록하는 구약성경 전체의 기조와도 일맥상통한다. 이스라엘 역사에 담긴 신앙고백을 한 마디로 요약하면 이것이다. “우리가 지나온 길을 돌아보니 모두 다 하나님의 은혜더라.”

151018 사무엘상(8) 순종과 위계질서

[사무엘상 15:22] 우리가 순종을 말할 때, 그것은 대개 어떤 위계질서와 관련된다. 위계질서에서 아랫사람에게 순종이 요구되는 것이다. 한국교회에는 유교식 위계질서가 그대로 들어와 있으며, 그것은 종종 성경으로 정당화된다. 성경 안에도 위계질서가 있다. 그러나 그것은 문화적인 것으로, 그 시대의 사람들이 하나님의 말씀을 이해할 수 있도록 계시의 도구로 사용된 것일 뿐, 그 자체가 계시는 아니다. 성경이 말하는 순종은, 사람에게 순종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께 순종하는 것이다. 하나님을 향한 순종을 바로 세움으로 우리의 가정과 교회와 사회가 올바른 관계로 회복될 수 있기를 바란다.

151011 사무엘상(7) 주인의 순종

[사무엘상 15:20-22] 헤렘은 적의 성읍과 전리품을 모두 진멸하여 하나님께 바치는 전쟁이다. 그래서 헤렘은 ‘진멸’을 뜻하며 동시에 ‘바친 물건’을 뜻하기도 한다. 이스라엘의 오랜 골칫거리였던 아말렉과의 전쟁(헤렘)에서 사울은 하나님께 바쳐야 할 전리품(헤렘)을 가로채고, 그것을 제사 드리기 위함이라 항변하지만, 그것은 궁색한 변명에 불과하다. 왜냐하면 헤렘 자체가 하나의 거룩한 제사 행위이기 때문이다. 사울은 이스라엘의 왕으로서, 그 전쟁을 주체적으로 수행하기보다는 수동적으로 움직였고, 자신의 책임을 회피함으로써 국가 지도자로서 무능을 드러냈다. 오늘날 헤렘은 일상으로 드리는 거룩한 산 제사(롬 12:1)로 대체된다. 다른 사람의 몸이 아니라 내 몸을 드리는 것이다. 그래서 일상은 영적 전쟁이기도 하다. 그 일상의 예배에 주체가 되자.

151004 사무엘상(6) 되살려 낸 도움의 돌

[사무엘기상 7:12-14] 사무엘기상 4장과 7장에는 블레셋과의 전쟁 이야기가 담겨 있다. 두 싸움은 매우 대조적이다. 4장에서 이스라엘은 하나님의 언약궤를 들고 전쟁에 나갔다. 하나님을 움직여 자기 편으로 만들고자 한 것이다. 결과는 대패였다. 그러나 7장에서 그들은, 하나님을 움직이려 하지 않고, 미스바에서 회개하여 스스로를 변화시켰다. 그 결과 그들은 싸우지도 않고 이겼다. 재미있게도 두 싸움은 모두 에벤에셀과 연결된다. 4장의 에벤에셀에도 어떤 감동적인 감사의 이야기가 담겨 있었을 것이다. 그러나 그 감사는 빛바래고 화석화 되어 버렸다. 사무엘이 세운 에벤에셀은 그 도움의 돌을 되살려낸 것이다. 나의 욕망에 따라 하나님을 움직이고자 할 때, 그 결과는 원망과 불평뿐이다. 그러나 나를 변화시킬 때, 하나님이 친히 싸우시고, 나는 감사밖에 할 것이 없다.

150927 사무엘상(5) 하나님은 왜 사울을 버렸을까?

[사무엘기상 13:7후-14] 하나님은 왜 사울을 버리셨을까? 사울이 직접 제사를 드림으로 제사장 사무엘의 영역을 침범했다는 정교분리식 해석은 적절하지 않다. 사울이 제사를 집례한 것은 아니기 때문이다(참조 삼하 6:17; 왕상3:2, 3-4). 그럼 사울이 뭘 잘못한 걸까? 하나님이 그에게 너무 가혹하셨던 것은 아닌가? 사울은 이스라엘의 첫 왕으로 이후 모든 왕들의 모델이 될 것이다. 그러므로 하나님은 그에게 더 엄격하실 수밖에 없었다. 왕의 핵심적인 임무는 하나님과 소통하여 그분의 뜻을 알고 그 뜻을 온 나라에 실현하여 하나님의 주 되심을 이루는 것이다. 그런데 그 역할을 사무엘이 대행하고 있었다. 그러므로 사울은 더 성숙하여 그 역할까지 이어받을 준비를 갖추어야 했다. 그러나 사울은 그 책임에 소극적이었다. 그는 마치 어른이 되지 못한 아들과 같아 ‘아버지’ 사무엘에게 의존적이었고, 심지어 사무엘이 죽은 후에도 그로부터 독립하지 못했다. 사울은 버림 받은 것이 아니라, 왕의 후보로서 훈련 과정에서 탈락한 것이다.

주일예배 안내

8월 2일 오전 11시(온라인예배)

설교자: 강윤주 목사 (모새골공동체교회)

본문:  마태복음 14장 13-21절, 이사야서 55장 1-3절

제목: “밥상 속에 담긴 하나님 나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