요한계시록

190915 요한계시록(28) 복이 있다 (계 22:6-21)

[설교요약]숫자 7과 4는 계시록의 내용에서 중요한 상징적 의미를 가질 뿐 아니라 이 책의 문학적 구성과 어휘 사용에도 신중하게 고려되었다. 많은 중요한 어휘들이 4회, 7회, 14회 또는 28회 사용된다. 복이 있다는 선언도 7회 사용된다. 의미에 따라 묶으면, 예언의 말씀을 지키는 자(2회) 곧 자기 옷(행위)을 살피는 자(2회)가 복이 있다. 그 삶의 결과는 죽음이 될 수도 있으나, 그들은 주님이 오시는 날 첫째 부활에 참여할 것이며, 어린양의 혼인잔치 곧 새 예루살렘에 초대받는 복을 누릴 것이다. 예수님은 곧 오시겠다 말씀하시며 성도들은 “아멘, 주 예수여, 오십시오!”(마라나타) 하고 화답한다. 마라나타의 신앙은 새 하늘과 새 땅을 바라볼 뿐 아니라 오늘 우리의 삶을 그것을 중심으로 재정향 한다.

190908 요한계시록(27) 새 예루살렘 (계 21:9-22:9)

[설교요약]새 예루살렘은 어린 양의 신부인 성도들을 가리키는 은유이다. 새 예루살렘은 지구를 떠난 저 멀리 어딘가에 있어 성도들이 그 공간으로 이동하는 것이 아니다. 성도들이 먼저 있고 하나님께서 성도들 위에 장막을 쳐 함께 거하심으로 새 예루살렘이 세워진다. 오늘 우리는 내재의 한계 속에 있고 하나님은 우리의 감각과 인식 너머에 계신다. 그러나 새 예루살렘에서는 초월과 내재의 경계가 없어진다. 우리가 하나님을 직접 대면하여 소통하기 때문이다. 오늘도 초월자이신 하나님은 성령을 통해 우리 안에 오셔서 내재하신다. 이렇게 초월을 품은 내재 속에서 우리는 새 예루살렘을 미리 경험하며 살 수 있다.

190901 요한계시록(26) 새 하늘과 새 땅 (계 21:1-8)

[설교요약]계시록에는 자연에 재앙이 내려 창조세계가 파괴되는 장면들이 종종 나오기 때문에, 종말은 자연의 파괴와 함께 온다고 오해하는 사람들이 있다. 그렇지 않다. 자연 재앙은 상징적인 의미를 가진다. 계시록에서 자연세계는 때로 인간세계의 일부로 다루어져 사람에 대한 재앙을 자연재앙으로 간접적으로 표현한다(16:4-6). 자연은 심판의 대상이 아니라 하나님의 심판의 도구로(16:8-9) 또는 사탄을 제어하는 도구로(12:15-16) 사용된다. 심판주 하나님의 위용 앞에 자연히 피해 달아난 것으로 형용하기도 한다(21:11). 심판은 땅을 향한 것이 아니라 땅을 망하게 하는 자들을 향한 것이다(11:18). 종말은 창조세계의 파괴가 아니라 창조세계의 회복이다.

190825 요한계시록(25) 폭력의 상징 (계 19:11-20:15)

[설교요약]사람들은 대개 폭력을 정당화하기 위해 선악의 이분법을 동원한다. 상대방이 너무 악하기 때문에 폭력을 사용할 수 밖에 없다는 논리이다. 계시록의 종말 심판 환상에는 선악의 이분법이 선명하게 나타난다. 그러나 계시록은 절대 악에 대한 심판을 말하면서도 그것을 폭력적으로 그리지 않기 위해 애쓴다. 바벨론을 심판하는 세 개의 화에는 사탄의 세력이 심판자로 등정하여 “칼로 일어선 자 칼로 망한다”는 경험적 진리를 확증한다. 역사의 종말에 사탄의 세력이 소멸되는 과정에서 예수 그리스도는 “싸우지 않고 이기신다.” 계시록에서 예수 그리스도는 “죽임 당하신 어린양“이다. 죽임 당함으로 이기는 것이 계시록이 그리는 싸움의 정석이다.

190818 요한계시록(24) 그 도시를 떠나라 (계 18장)

[설교요약]계시록 18장은 바벨론의 멸망을 주로 등장인물들의 대사를 통해 서술하고 또 해설해준다. 바벨론이 심판을 받는 이유는 음행과 사치와 성도들에 대한 박해이다. 본문에는 특히 바벨론의 멸망에 반응하는 세 그룹의 사람들 곧 땅의 왕들과 땅의 상인들과 선원들이 등장하는데, 이들의 관심은 한결같이 현실적 이익에 묶여 있다. 세상의 종말을 맞이하고도 그들은 “내 돈, 내 돈!” 하며 부르짖을 뿐이다. 하늘에서 들려온 음성은 그 도시를 떠나라고 촉구한다(18:4). 이것은 오직 하나님을 두려워하고 그분께 영광을 돌리며 하나님만을 경배하라는 삽입부의 권면(14:7)을 비유적으로 다시 표현한 것이다. 그러한 촉구와 함께 본문은 바벨론을 떠나지 못하는 사람들이 있음을 보여준다.

190804 요한계시록(23) 오늘의 바벨론 (계 17장)

[설교요약]계시록이 말하는 바벨론은 로마 제국이다. 그러나 동시에 바벨론은 로마 제국보다 많은 것을 포함한다. 로마 제국은 파라오의 질서가 사람들을 지배하기 위해 취해 온 다양한 현실적 양태들 가운데 하나일 뿐이기 때문이다. 계시록의 궁극적인 관심은 바벨론의 배후에서 바벨론을 움직이고 있던 파라오의 질서에 있다. 계시록은 “짐승”을 통해 그것을 보여준다. 계시록 13장에서 짐승은 로마의 황제들 가운데 하나로 나타난다. 그러나 17장에서는 일곱 명의 황제를 포함하는 집단적인 실체로 비유된다. 짐승과 바벨론은 운명공동체인 듯 하나, 17:16에서 짐승은 바벨론을 무너뜨리며, 바벨론이 멸망한 후에도 짐승은 살아있다. 바벨론은 짐승이 바꿔 입은 옷들 가운데 하나에 불과하다. 짐승은 오늘날 새로운 바벨론의 옷을 입고 나타난다. 파라오의 질서를 식별하자.

190714 요한계시록(22) 아마겟돈 전쟁 (계 16장)

[설교요약]핼 린지(Hal Lindsey)가 1970년에 발간한 <대 유성 지구의 종말)은 1948년 이스라엘의 재 건국을 종말 카운트 다운의 시작으로 간주한다. 그리고 계시록의 아마겟돈 전쟁을 제3차세계대전의 마지막 단계로 이해한다. 그러나 여섯째 나팔로부터 넷째-다섯째-여섯째 대접, 예수 재림 후 사탄의 세력과의 전쟁, 그리고 천년왕국 후 곡과 마곡과의 싸움으로 이어지는 계시록의 아마겟돈 전쟁은, 현실 국가들 사이의 싸움이 아니라, 하나님의 심판을 수행하는 천사의 군대가 사탄을 군대를 소멸시키는 과정이다. 린지는 영적인 것을 지나치게 정치적으로 해석했을 아니라, 현실 국가들의 핵무기 경쟁을 정당화하고, 현대 이스라엘의 대 팔레스타인 인종차별 정책을 합리화 한다. 그러나 70만에 이르는 팔레스타인 그리스도인들에게 종말이란 무엇일까? 하나님 나라는 우리나라일 뿐 아니라 그들의 나라이기도 하다.

190707 요한계시록(21) 하나님의 의 (계 15장)

[설교요약]계시록 15-16장은 일곱 대접 재앙을 서술하는데, 이를 전후하여 하나님의 “진노”가 집중적으로 언급된다(11:18; 14:10, 19; 15:1, 7; 16:1, 19). 하나님이 오늘의 고난의 현실에 결코 무심하지 않으시며, 가슴에 분노를 품고 계시다가, 종말에 박해자들에게 그 진노를 쏟으실 것이다. 이것은 하나님의 행동을 너무 인간적인 방식으로 서술한 것이 아닌가? 하나님의 진노는 언약의 맥락에서 이해되어야 한다. 언약의 어휘들 가운데 하나님의 의로우심이 15장에서 처음 언급되며, 하나님의 신실하심(과 참되심)이 그와 연결된다. “원한을 풀어준다”는 말도 같은 맥락에서 이해된다.

190630 요한계시록(20) 다른 가치 (계 14장)

[설교요약]계시록 14장은 크게 세 부분으로 나뉜다. 1-5절은 하늘 합창 장면으로 구원받은 성도들의 모습을 미리 보여준다. 6-13절은 세 천사의 메시지와 하늘에서 들려온 음성으로서, 삽입부(10-14) 전체를 대변하는 권면을 담고 있다. 로마황제가 아니라 하나님을 경배하라. 바벨론은 무너질 것이며, 짐승에게 경배하던 자들은 심판을 받을 것이다. 그러나 심판이 시작되기까지 고난의 기간이 잠시 더 이어질 것이다. 마지막으로 14-20절은 삽입부를 중심줄거리와 연결해 주는 기능을 한다. 계시록의 성도들은 세상과 다른 가치를 따라 살았던 사람들이다. 그들은 황제숭배로부터 오는 유익을 거절하고 죽임당하신 어린양을 따름으로 하나님께 거룩하게 구별된 사람들이었다. 로마제국은 그들을 정죄했으나, 하나님은 그들이 결백하다고 선언하신다.

190623 요한계시록(19) 666 (계 13장)

[설교요약]요한계시록 13장은 삽입부에 속해 있다. 삽입부는 미래에 일어날 일을 보여주는 것이 아니라 요한과 소아시아 일곱 교회의 현실을 해석해준다. 따라서 열 뿔 가진 짐승과 “666”이 무엇인지도 먼저 주후 1세기의 역사 속에서 찾아야 한다. 계시록 13장은 로마제국이 자행하고 있던 황제숭배의 현실을 보여준다. 그 당시 그리스도인들은 조합활동에 포함된 황제숭배를 거부함으로 인해 경제적 불이익을 감수해야 했는데, 계시록은 그것을 짐승의 표를 받은 사람만 거래할 수 있는 것으로 상징적으로 서술한다. 666은 사람의 이름이 타나내는 숫자, 곧 게마트리아이다. 이것은 사탄의 소유권 표시이다. 이 상징적인 이야기는 오늘 우리에게도 적용된다. 우리도 이미와 아직 사이 삼년 반의 기간에 속해 있기 때문이다. 파라오의 질서가 아니라 하나님을 주님으로 분명히 고백하고 실천하는 진정한 믿음이 요청된다.

주일예배 안내

8월 2일 오전 11시(온라인예배)

설교자: 강윤주 목사 (모새골공동체교회)

본문:  마태복음 14장 13-21절, 이사야서 55장 1-3절

제목: “밥상 속에 담긴 하나님 나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