설교

150719 자유와 규범

[야고보서 1:25] 하나님의 주 되심을 이루기 위한 삶의 규범은 어떠해야 할까? 본문은 그것을 ‘완전한 율법, 곧 자유를 주는 율법’이라고 규정한다. 이 표현은 기존의 율법이 윤리 규범으로서 완전하지 못했음을 암시한다. 그리고 완전한 삶의 규범은 ‘자유를 주는’ 것이어야 함을 보여준다. 이것이 무엇일까? 우리 삶에 하나님의 주 되심이 온전히 이루어지면, 타락하기 전 에덴동산의 아담처럼, 우리의 뜻이 하나님의 뜻과 완전히 일치할 것이며, 그래서 우리는 완전한 자유를 누리게 될 것이다. 그러나 이러한 자유는 우리가 살아있는 동안에는 완성되지 않은다. 그러므로 규범이 필요하다. 여기서 기억해야 할 것은, (1)규범은 일시적이며, (2)결과를 모방하는 것이기 때문에, (3)규범을 따라 사는 것과 하나님의 뜻을 따라 사는 것을 단순히 동일시할 수는 없다. 그렇게 동일시하면 규범이 율법이 되어 버린다. 그러지 않기 위해서는, 규범을 지키게 하는 동력이, 규범 자체로부터가 아니라, 하나님의 주 되심의 능력으로부터 나오게 해야 한다. 그를 위해 우리 자신을 하나님께 내어드리는 기도와 영성훈련이 계속되어야 한다. 우리의 기도를 질적으로 변화시키자.

150712 세상: 분별과 대화

[고린도전서 8:1-3] 하나님의 피조세계로서의 이 세상은 우리의 싸움의 대상이 아니다. 우리가 싸워야 할 것은 그 배후에 또는 심층에 있는 영적인 실체들이다. 이 세상에 대해 우리가 가져야 할 태도는 분별과 대화이다. 분별이 필요한 이유는 파라오의 질서가 이 세상에 강한 지배력을 행사하고 있어서 이 세상을 있는 그대로 선하다 할 수는 없기 때문이다. 그러나 싸움이 아니라 대화가 필요한 이유는, 그렇다고 해서, 이 세상이 그 자체로 악한 것은 아니기 때문이다. 이 세상에서 하나님의 주 되심의 가능성을 보아야 한다. 그리고 기독교 신앙을 이 세상에 적용할 수 있는 가치들로 번역해 내야 한다. 대화를 위해서는 이분법적 사고, 즉 흑백논리를 극복해야 한다. 이분법은 대화가 아니라 전쟁의 논리이다. 그리고 정치와 언론이 부추기는 왜곡된 이분법은 신앙에도 유해하다. 싸움의 대상과 대화의 대상을 혼동시키기 때문이다. 우리 지식의 출처가 되는 언론을 검증하고, 우리의 지식의 상대성을 인정해야 한다. 그렇게 시작된 대화를 통해 비로소 일상의 복음화가 진전되어 갈 것이다.

150705 세상을 바로 이해하기

[요한복음 3:16-17] 신약성경에서 ‘세상’이라는 말은 때로 부정적 의미로 사용되기도 하고 중립적 의미로 사용되기도 한다. 부정적 의미의 세상은 하나님을 적대하는 세력, 즉 파라오의 질서로서의 세상이며, 성경이 말하는 ‘이 세대’이다. 중립적 의미의 세상은 하나님께서 그토록 사랑하셔서 외아들을 내어주시기까지 하셨던 그 세상, 즉 하나님의 피조세계이다. 하나님은 이 세상으로부터 우리를 구출하시는 것이 아니라, 이 세상을 구원하시는 것이다. 우리가 그동안 세상의 두 가지 의미를 혼동해 온 배경에는 (1)교회와 세상의 이분법과 (2)요한계시록에 대한 그릇된 해석이 있다. 부정적 의미의 세상이란 교회 밖의 영역을 말하는 것이 아니다. 요한복음이 부정적으로 언급하는 세상은 하나님을 안믿는 사람들이 아니라 하나님을 잘못 믿는 사람들이다. 요한계시록이 보여주는 종말의 구원은 피조세계를 파괴하는 것이 아니다. 오히려 모든 세계를 하나님께서 원래 창조하셨던 온전한 모습으로 회복하는 것이다.

150628 지피지기 백전불태

[에베소서 6:12] 파라오의 질서에 대면할 때, 우리는 희망보다 절망에 빠지게 된다. 우리가 일상에 하나님의 주 되심을 이루기 위해 가장 먼저 해야 할 일은 이 절망을 희망으로 바꾸는 것이다. 그러기 위해서는 섵부른 행동보다 정확한 분석과 식별이 선행되어야 한다. 지피지기이면 백전불태라 하지 않는가? 우리가 복음에 관해 공부하는 것은 이러한 분별의 토대를 놓는 것이다. 그러므로 복음을 설교하는 것도 중요한 실천이다. 몇 가지 유념할 것은, 파라오의 질서는 (1)현실적으로 사회구조화 되어 있으며, 동시에 (2)영적이라는 것이다. 그래서 우리는 현실을 정확히 볼 수 있어야 하고, 그 속에서 작동하는 영적인 힘을 읽어낼 수 있어야 한다. 예수님은 파라오의 질서가 현실에서 돈과 권력을 통해 우리를 지배함을 가르쳐 주신다. 그러나 현실적인 정치세력이나 이념을 파라오의 질서와 동일시하면 안된다. 왜냐하면 파라오의 질서는 현실보다 한 차원 더 깊은 가치의 층위, 영적인 층위에 있기 때문이다. 일상의 복음화는 복음의 전문가인 목사와 일상의 전문가인 평신도가 계속되는 동역을 통해 함께 이루어가야 할 일이다.

150621 하나님의 시간으로 살기

[로마서 12:2] 신약성서 헬라어에는 시간을 가리키는 어휘가 여럿 있는데, 그 가운데 ‘크로노스’와 ‘카이로스’가 대조적으로 사용된다. 크로노스는 우리가 일상적으로 경험하는 양적인 시간이다. 하나님은 시간을 초월해 계신다. 그러나 때때로 그 하나님이 인간의 시간 속으로 뚫고 들어오셔서 우리를 만나는 때가 있는데, 그 때 시간은 질적으로 전혀 다른 시간, 즉 카이로스로 바뀐다. 하나님의 주 되심은 이 카이로스를 통해 이루어진다. 일상의 복음화란 우리의 크로노스들을 카이로스로 변화시켜 가는 것이다. 우리가 이 세대를 거스르지 못하고 파라오의 질서에 끌려가는 이유는 우리의 믿음이 크로노스의 한계를 벗어나지 못하기 때문이다. 크로노스 너머에 계시는 하나님께 희망을 두자. 그럴 때 카이로스로 경험되는 하나님의 능력으로 파라오의 질서를 거스를 수 있게 될 것이다.

150607 복음과 일상

[로마서 12:1-2] 우리가 일상에서 어떻게 그리스도인으로 살아갈 것인가? 그동안 기독교회는 이 질문에 적절한 답을 주지 못해왔다. 그 이유는 복음이 온전히 이해되지 못했기 때문이다. 교회가 전통적으로 가르쳐 온 복음의 핵심은 ‘십자가의 속죄’이다. 이것은 매우 중요한 복음의 요소이지만, 복음의 일부일 뿐 전부는 아니다. 십자가 속죄의 복음은 (1)믿음과 삶을 단절시키고, (2)교회와 세상을 단절시키는 한계를 가지고 있다. 신학적으로, 이 복음에는 (3)십자가만 있고 부활이 없으며, (4)예수의 복음과 바울의 복음을 분리시킨다. 성경이 말하는 온전한 복음의 중심은 하나님의 나라, 하나님의 주 되심이다. 이 복음은 (1)구약과 예수와 바울을 관통한다. 하나님 나라의 복음에서, (2)믿음은 곧 삶이며, (3)교회와 세상이 모두 복음의 영역이다. 그리고 (4)복음을 사는 것은 부활의 능력으로, 성령에 이끌려, 종말론적으로 사는 것이다. 이 복음이 일상에서 어떻게 구현될 수 있을지 앞으로 몇 주간 함께 모색해 나가기로 하자.

주일 예배 안내

2024년 4월 21일 오전 11시

설교자: 안용성 목사

본문:   누가복음 22:24 – 27

제목:   교회의 기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