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태복음 4:1-11] 예수는 하나님 나라의 복음의 선포자이면서 동시에 자신의 삶에 그 복음, 즉 하나님의 주 되심을 모범적으로 실현하신 분이다. 예수께서 광야에서 40일간 금식하신 후 받으신 시험이 그것을 잘 보여준다. 사탄의 세 가지 시험에 대응하여 예수께서 구약을 인용하여 하신 말씀에 주목하자. (1) 사람이 떡으로만 살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말씀으로 살 것이라는 말씀(신명기 8:3)은 우리의 생존이 오직 하나님께 달려있음을 보여준다. (2) 하나님을 시험하지 말라는 말씀(신 6:16)은 하나님을 전적으로 신뢰하라는 뜻이다. (3) 하나님께 경배하고 그분만 섬기라는 말씀(신 6:13)은 이스라엘이 픙요 가운데 하나님을 잊지 말 것을 경고한다. 이 모든 것을 통해 예수님은 그 자신의 삶에 온전히 하나님의 주 되심을 이루셨다.
150305 파라오의 질서를 식별하기 (장신대 채플 설교)
[출애굽기5:15-21] 복음은 하나님의 나라, 즉 하나님의 주 되심이며, 하나님을 주님으로 섬기기 위해 우리는 이전에 섬기던 주로부터 떠나야 한다. 십계명의 제1계명은 그것을 다른 말로 표현한 것이다. 여기에서, 우리의 숭배를 받기 위해 하나님과 겨루는 존재, 즉 ‘다른 신’은 결코 추상적이거나 신화적인 존재가 아니다. 그것은 현실의 심층에서 현실을 움직이는 존재, 즉 파라오의 질서이다. 예수님은 파라오의 질서가 때로 ‘맘몬'(마 6:23)과 ‘권력'(마 4:8-9)으로 나타남을 알려주신다. 그리고 바울은 그것이 ‘육체의 욕망’으로 내면화 됨을 보여준다(갈 5:16 이하). 한국교회 위기의 원인을 두 가지 찾아보자면, 하나는 복음을 교리로 축소하여 믿음과 삶을 분리시킨 것이고, 다른 하나는 교회와 세상의 이분법에 빠져 파라오의 질서에 무지한 결과, 그것이 교회 안으로 들어와 교회를 지배하도록 내버려 둔 것이다. 파라오의 질서를 정확히 식별하는 일이 신학수업의 근본 과제 중 하나가 되어야 할 것이다.
141228 우리는 무엇을 믿는가?
[로마서 10:9-10] 우리는 전통적으로 십자가 속죄의 복음이 바울의 복음이라 믿어왔다. 그러나 바울의 복음은 예수의 복음과 동일한 하나님 나라의 복음, 하나님의 주 되심의 복음이다. 그리고 십자가 속죄의 복음은 하나님 나라의 복음을 구성하는 한 부분이다. 로마서 1:2-4에 나오는 복음의 정의에서, 바울은 예수께서 십자가와 부활을 통해 우리의 주님이 되셨다고 선언한다. 또 로마서 10:9-10에서는, 우리가 십자가와 부활을 통해 주님이 되신 예수를 우리 주로 고백하면 구원에 이르게 된다고 말한다. 예수를 주로 고백하는 일은 마음과 입에서 그치지 않는다. 그 고백은 반드시 삶으로, 예수가 주님이 되시는 삶으로 나타날 수밖에 없다. 그래서 믿음은 삶이다. 그 삶을 어떻게 실천할 수 있을까? 최근 우리 사회의 현실을 잘 보여주는 ‘갑의 횡포’를 한 사례로 삼아 그 길을 모색해 본다.
140608 세상의 소통을 촉진하는 교회
[사도행전 2:5-13] 기독교는 소통의 종교이다. 말씀이신 하나님이 사람과 소통하기 위해 사람이 되어 오셨고, 성령이 임하실 때 소통의 역사가 일어났다. 그러나 한국교회는 교회 밖의 사회와 소통하지 못하고, 그 뿐 아니라, 세속사회의 구성원들 사이에서도 원활한 소통이 일어나지 못하고 있다. 그 이유는 모두가 공유하는 사회적 가치가 형성되어 있지 않기 때문이다. 그래서 정치는 편가르기로 전락하기 일쑤이고, 교회는 세상과 담을 쌓고 지낸다. 이를 극복하고 세상의 소통을 촉진하는 교회가 되기 위해, 복음이 사회적 가치로 창출되어야 한다. 이를 위해 복음이 재발견되어야 한다. 복음은 교리가 아니라 삶이다.
140302 산상수훈(4) 너희 빛이여, 빛나거라!
[마태복음 5:13-16] 산상수훈의 앞부분(마 5:1-16) 직설법으로 복음을 선포하며 그 뒤에 명령법으로 된 윤리적 권면이 이어진다. 본문은 직설법이다. 하나님은 우리가 소금이 되라, 빛이 되라 말씀하시지 않고, 우리가 이미 소금이며 빛이라 말씀하시는 것이다. 이 비유에서 우리는 등불이다. 등불을 등경 위에 놓으시는 분은 하나님이시다. 우리는 그저 등불로 존재하기만 하면 된다. 16절은 “너희 빛이여 빛나거라” 하는 3인칭 명령형으로 되어있다. ‘너희’에게 명령하는 것이 아니라 ‘빛’에게 명령하는 것이다. 그것은 “김연아의 찬란한 기록이여, 영원히 빛나라!” 할 때처럼, 윤리적 명령보다는 축복에 가까운 말이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