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설교요약]아브라함이 이집트에 내려가 저지른 실수는 그가 하나님을 잘 알지 못하기 때문이었다. 그가 현실에서 이미 터득한 경험적 지혜는 하나님에 대한 앎을 방해할 뿐이었다. 하나님은 그를 훈련시키시고 그에게 자신을 알려주시며 그의 믿음을 성숙시켜 주셨다. 레반트에서 살아가기는 하나님을 알아가기였다. 믿음이란 삶의 모든 영역에서 하나님과 소통하여 그분을 알아가며 하나님의 주 되심을 이루어가는 것이다.
210221 창세기(31) 종교의 시작 (창 12:4-9)
[설교요약]노아 이후 아브람 전까지는 하나님이 잊혀진 시대였다. 하나님의 부르심을 따라 하란을 떠나 가나안 땅에 이른 아브람은 하나님께 예배를 드림으로 이스라엘 종교의 시작을 알린다. 그 예배의 장소는 상수리 나무였다. 상수리 나무는 그 거대한 규모로 인해 세계축으로 간주되었을 것이다. 세계 축은 사람들의 땅을 천상 세계와 연결함으로 세계의 중심이 된다. 아브람의 상수리 나무는 바벨탑의 그릇된 시도를 교정하는 새로운 세계 축이다. 예배를 통해 세계가 창조된다. 예배와 현실 변화가 함께 가는 것이다. 아브라함의 예배에는 떠남이 동반되었다. 믿음이란 단순히 교리를 받아들이거나 종교 행위에 참석함을 넘어 하나님께서 이끄시는 새로운 삶을 향해 떠나는 모험이다.
210214 창세기(30) 주 달려 죽은 십자가 (창 12:1-3)
[설교요약]하나님께서는 아브라함에게 그의 후손을 큰 민족으로 만들고 그들에게 가나안 땅을 주시겠다고 약속하셨다. 이 약속은 출애굽 후 가나안 입성을 통해 구체적으로 실현된다. 그런데 그 종족학살을 통한 점령 과정의 이미지가 너무 강력하고 충격적이다 보니 그것이 구약성경과 아브라함 이야기를 읽는 관점으로 작용하게 된다. 그러나 아브라함에게 주신 약속은 다르다. 창세기는 11장에 나온 “백성”(암)이 아니라 10장에 나온 “민족”(고이)와 “종족”(미슈파하)이라는 단어를 사용하여, 많은 민족과 종족 사이에서 샬롬을 이루어 공존하는 나라를 그려주신다. 하나님은 아브라함의 후손이 “큰” 나라가 되게 하시고 “크게” 이름을 떨치게 하실 것이나, 바벨이라는 도시와는 다른 방법으로 그리하실 것이다. 창세기는 가나안 땅에 이미 살고 있던 사람들의 존재를 인정한다. 모든 민족이 아브라함으로 인해 복을 받을 것이다.
210207 창세기(29) 하나님이 기대하시는 나라 (창11:27-12:3)
[설교요약]비옥한 초승달 지대는 고대 근동 세계의 주요 무대이다. 여기에서 중심은 메소포타미아와 이집트이고, 그 사이에 있는 레반트는 양대 제국의 대리전쟁터였다. 그러나 하나님은 아브라함을 레반트의 한 지역인 가나안으로 보내셔서 그의 백성의 나라를 세우게 하셨다. 그것은 바벨이라는 도시와 대조되는 나라이다. 하나님은 샬롬을 창조하시나, 사람들은 그것을 질서로 바꾼다. 하나님은 바벨이라는 도시를 흩으시고, 아브라함과 함께 다시 살롬을 창조하신다.
210124 창세기(27) 노아의 후손 (창9:18-10:32; 11:10-32)
[설교요약]미국 역사 초기 백인들은 노아의 세 아들 이야기를 이용하여 흑인 노예 제도를 정당화 하려 했다. 함의 후손인 흑인들이 야벳의 후손인 백인들을 섬기는 것이 성경에 이미 예정된 일이라는 주장이다. 그러나 이것은 성경 본문과 문자적으로 불일치한다. 창세기 10장에 나오는 셈과 함과 야벳의 족보는 그 세 아들이 인종의 구분과 무관함을 잘 보여준다. 노아가 저주한 대상은 함이 아니라 함의 아들 가나안이다. 이것은 이스라엘의 가나안 지배와도 무관하다. 두 가지 기준으로 우리의 성서 해석을 성찰해 볼 필요가 있다. (1) 본문이 허용하는 해석인가? (2) 성서 해석이 결과적으로 어떤 사람들에 대한 지배나 차별을 정당화 하고 있지는 않은가?
200110 창세기(25) 무지개 언약: 생명 존중 (창 9:1-17)
[설교요약]돌아감의 목표는 언약이다. 하나님은 노아의 홍수가 끝난 후 창조의 언약을 갱신하셨다. 이 무지개 언약에서 하나님은 사람 뿐 아니라 모든 생물을 언약의 대상으로 삼으셨다. 그리고 다시는 사람으로 인해 모든 생물을 멸하지 않으시겠다고 약속하셨다. 이 언약에서 하나님은 사람에게 육식을 허용하시되 고기를 피채 먹지는 말라고 명하셨다. 그것은 생명을 존중하라는 요구이다. 육식에 대한 허용이 약육강식에 대한 허락을 의미하는 것은 아니다. 우리의 식탁에서 창조의 샬롬을 이루자.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