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220 창세기(22) 다시 처음으로 (창 7:1-24)
[설교요약]노아의 홍수 이야기는 창세기의 종말론이다. 하늘의 창문이 열려 “하맙불” 곧 궁창 위에 있던 물이 쏟아져 내리고 깊음(트홈)의 샘들이 터져 지표면으로 물이 올라왔다. 그 결과 온 땅은 물로 덮인 창조 이전의 상태로 돌아갔다. 그 때 칠흙 같은 어둠 속에서 물 위에 하나님의 영이 움직이고 계셨다. 홍수가 난 후 물 위에는 방주가 떠다니고 있었다. 노아의 홍수는 하나님께서 은혜를 거두어가신 사건이었다. 그 은혜는 생명의 은혜이며 창조세계의 은혜였다. 다시 처음으로 돌아가 은혜에 반응하는 삶을 살자. 거저 받았으니 거저 주자. 크리스마스는 하맙불 위에 계시던 하나님 사람이 되어, 홍수(하맙불)로 멸망 할 세상 속에 들어오심으로써 은혜에 반응하는 삶의 모범을 보여주신 사건이다.
201213 창세기(21) 노아: 은혜를 입은 자 (창 6:5-22)
[설교요약]노아의 홍수는 하나님께서 창조를 돌이키심으로 일어난 사건이다. 하나님도 하신 일을 돌이키시는가? 그것은 하나님과 사람이 선택의 자유에 기반한 언약 관계에 있기 때문이다. 노아는 하나님의 은혜를 입은 자였다. 그것은 오직 노아만이 하나님의 은혜를 인정하고 언약에 신실했다는 뜻이다. 인류문명은 욕망의 분모를 조절하지 않은 채 소유이 분자를 늘여 만족을 극대화시키는 방향으로 발전해 왔다, 최근의 소비경제는 소비를 늘이기 위해 사람의 욕망을 더 자극한다. 사람을 만족하지 못하게 하고 행복하지 못하게 한다. 그리고 자연 자원을 무한 개발하려 한다. 이것은 은혜의 인식에 기반한 감사의 삶과는 반대되는 것이다. 은혜를 알고 욕망을 조절하여 자족하는 방향으로 인류의 길을 바꾸어야 한다.
201206 창세기(20) 영원한 삶의 욕망(창 6:1-4)
[설교요약]
“하나님의 아들들”은 천상적 존재들을 가리키는 숙어적 표현이다(시 29:1; 욥 1:6; 단 3:25). 본문은 천상적 존재들과 사람의 딸들과의 결혼이 강제적 또는 폭력적이었다거나 전자의 주도에 의한 것이었다고 말하지 않는다. 오히려 사람들은 천상적 존재와 혼인 관계를 맺음으로 불멸을 획득하고자 했을 것이다. 그러나 그 결과는 네피림이라는 돌연변이였을 뿐이며, 영생으로부터는 오히려 더 멀어졌다(3절). 욕망에 지배당한 채 영원히 사는 것은 결코 복이 아니다. 오히려 우리 인생의 한 점은 하나님의 영원이라는 무한한 선의 일부임을 기억하자.
201129 창세기(19) 리셋 (창 4:25-5:32)
[설교요약]
하나님은 죄의 지배가 확산되는 인류역사에 두 가지 방식으로 개입하셔서 인류를 새롭게 하신다. (1) 인류 역사가 타락해 가는 과정에서도 하나님은 끊임없이 은혜를 베푸시고 회개할 기회를 주신다. 그러나 인류는 죄의 지배 속으로 더 깊이 빠져들어 돌이킬 수 없는 지경에 이른다. (2) 그 때 하나님이 더 적극적으로 개입하셔서 새로운 인류를 창조하시고 그들과 함께 새로운 역사를 시작하신다(노아). (3) 그 과정은 죄가 편만하던 시대에 이미 시작된다(셋). 하나님께서 셋과 함께 리셋을 시작하셨다. 코비드 팬데믹은 인류의 리셋을 요구한다. 그리고 하나님은 그 일에 쓰임 받을 새로운 인류를 찾으신다. 대림절과 함께 교회력의 새해가 시작된다. 새로운 시작의 기회로 삼자.
201122 그리스도로 옷 입은 교회 (갈 3:26-28)
[설교요약]
우리 모두는 하나님의 자녀들이며 그리스도로 옷 입은 사람들이다. 옷은 사회적 신분의 상징으로, 유대인과 이방인, 종과 자유인, 남자와 여자를 구별한다. 그러나 이제 우리는 그리스도로 옷입은 자들이 되었다. 우리는 하나님의 자녀들이다. 자녀의 신분은 부모에 의해 결정되며, 모두 동일하다. 사회적 신분이 교회 구성원의 자격을 결정할 수 없고, 교회 내 역할 특히 리더십의 자격 기준이 될 수 없다. 그루터기교회는 변화를 계속해 가고 있다. 오늘 여성 장로를 세움으로써 한 걸음 더 진전한다. 이 때에 적절한 은혜를 내리신 하나님께 감사하며, 앞으로도 시의적절하게 그루터기교회를 변화시켜 가실 주님께 우리를 온전히 내어드린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