설교

181202 고린도전서(14) 부활의 시작 (고전 15:20-26)

[설교요약]예수는 메시아이실 뿐 아니라, 고난받는 종이며, 하나님의 나라를 가져오신 인자이기도 하다. 예수를 따르던 자들이 예수가 바로 그분이심을 알아보게 된 결정적인 계기는 부활이다. 그들은 예수의 부활이 다니엘서가 예고하는 종말의 부활의 시작, 곧 부활의 첫 열매임을 깨달았다. 예수와 함께 종말이 시작된 것이다. 그것이 기독교 신앙의 출발이다. 교회는 종말의 시작과 함께 시작되었으며 종말의 완성과 함께 끝난다. 그래서 기독교 신앙은 처음부터 끝까지 종말신앙이다. 그것은 종말을 기다리며 사는 것이 아니라 이미 시작된 종말을 사는 것이다. 그 종말은 죽음의 종말이다. 부활은 단지 죽은 사람이 다시 살아남으로 그치지 않는다. 부활은 곧 죽음의 멸망이다. 종말을 사는 것은 부활의 생명으로 사는 것이다.

181125 고린도전서(13) 사랑은 영원합니다 (고전 13:8-10; 엡 4:11-12)

[설교요약] 예언도 방언도 지식도 그리고 그 어떤 은사도 한시적이다. 천국에는 더 이상의 가르침이나 권면도 섬김이나 나눔이나 자선도 필요하지 않다. 왜냐하면 천국에는 결핍이 없기 때문이다. 결핍이 없다면 사랑도 필요없는 것 아닐까? 그렇지 않다. 결핍에서 시작되어 그것을 채워줄 대상을 향하는 것이 에로스의 사랑이다. 에리히 프롬은 사랑이 대상의 문제가 아니라 주체의 문제임을 바로 보았다. 인간의 소외를 해결하는 길이 사랑이라는 것이다. 그러나 프롬의 사랑 역시 결핍에서 출발한다. 하나님의 사랑은 인간의 타락으로 결핍이 시작되기 전부터 존재했다. 삼위일체 하나님을 서로 이어주는 것이 사랑이다. 그리고 사랑은 천국에서도 계속될 것이다. 그 사랑을 이 땅에 선취하는 것이 그리스도인의 삶이다.

181118 고린도전서(12) 아가페 (고전 12:31-13:7)

[설교요약] 사랑을 뜻하는 헬라어 아가페는 동시에 초대교회의 애찬을 가리키는 말이기도 했다. 고린도전서 13장이 보여주는 사랑 곧 아가페의 길은 우리교회의 애찬 곧 아가페가 나아갈 길이기도 하다. 사랑은 오래 참는다. 잘하는 사람이 못하는 사람을 참아주어야 한다. 사랑은 친절하다. 수고한 봉사자들에게 감사를 표현하는 친절을 잊지 말자. 시기하고 뽐내고 교만한 것은 비교에서 시작된다. 다른 조와 비교하지 말자. 사랑은 무례하지 않다. 무례함이란 다른 사람의 사랑을 강요하는 것이다. 사랑은 자기의 방식을 고집하지 않는다. 애찬을 어떤 방식으로 하느냐보다 더 중요한 것은 애찬에 어떻게 사랑을 담아내느냐이다. 사랑은 서로를 믿어주며 같은 목표를 바라보며 같은 소망을 품는 것이다. 더 성숙한 그루터기교회를 함께 소망하며 애찬에 함께 사랑을 담아보자.

181111 고린도전서(11) 그리스도의 몸의 함의 (고전 12:11-37)

[설교요약]교회는 그리스도의 몸이다. 공동체를 몸에 비유하는 것은 바울 당시 고대 로마 사회에서도 종종 볼 수 있었다. 그 비유는 주로 사회적으로 낮은 계급의 사람들로 하여금 계급 질서를 받아들이고 순응하게 하기 위해 사용되었다. 그러나 바울은 그와 다른 방식으로 몸의 비유를 사용한다. 고린도전서의 비유는 공동체의 다양성과 각 지체들의 가치를 강조하며, 교회 내의 영향력 있는 사람들과 높은 계급의 사람들을 향한다. 주목할 것은 바울이 교회를 그리스도와 동일시한다는 점이다. 하나님이 예수를 통해 성육신 하셨듯이, 오늘날은 교회를 통하여 자신을 드러내신다. 과거에 그리스도께서 하셨던 일을 지금은 교회가 하도록 기대된다. 그것은 하나님의 나라를 말로 선포하며 교회의 삶으로 하나님의 나라를 보여주는 것이다. 그것은 교회 내에 존재하는 파라오의 질서에 대항하는 일로부터 시작된다.

181104 “고린도전서(10) 주님의 만찬” (고전 11:17-34)

[설교요약]성찬성례전의 제정사로 많이 사용되는 고린도전서 11:23-26은 본래, 예전화 된 성찬이 아니라, 고린도교회의 애찬에 적용된 말씀이다. 바울은 애찬을 “주님의 만찬”이라 부르며, “그리스도의 몸의 코이노니”와 “그리스도의 피의 코이노니아”로 여긴다. 그러나 고린도교회에서는 그 코이노니아가 오히려 분열의 씨앗이 되고 있었다. 그것은 부자들과 가난한 사람들 사이에서 일어난 차별인데, 애찬을 할 때 집 주인과 부자들은 트리클리니움에 둘러앉아 좋은 음식과 술을 나누고 가난한 사람들은 아트리움에 서서 빈약한 음식을 나누거나 아예 굶기까지 하는 일들이 일어나고 있었던 것이다. 애찬이란 단지 배고픔을 해결하기 위한 것이 아니다. 애찬은 그리스도의 몸과 피를 나누는 것이기 때문이다. 우리가 먹는 것이 곧 우리의 존재이다. 그래서 우리는 그리스도의 몸이 된다.

181028 “고린도전서(9) 교회와 세상2” (고전 6:1-4)

[설교요약]예수님은 왜 아직 안 오실까? 많은 경우, 이 질문의 배경에는 세상이 악해져 가고 우리는 그 악한 세상의 피해자라는 생각이 암시되어 있다. 과연 그럴까? 기독교가 로마의 국교가 된 후 최근까지 기독교인들은 유럽과 미국과 전세계의 지배자였다. 세상이 갈수록 악해지는 것은 기독교인들이 힘을 가지지 못해서가 아니다. 힘이 있으나 파라오의 질서를 따라 잘못 사용했기 때문이다. 예수님이 오시는 것은 파라오의 질서를 심판하시기 위함인데, 지금 오신다면 누구를 심판하셔야 할까? 예수님도 난감하시지 않을까? 종교개혁의 정신은 “아드 폰테스”(Ad Fontes), 우리 신앙의 근원으로 돌아가는 것이다. 회개하는 것이다. 개혁의 시기에는 눈을 열고 귀를 기울여 주님의 계시를 얻기에 힘써야 한다. 복음을 알기에 힘쓰고, 그 복음에 비추어 자신과 교회를 철저히 성찰하자.

주일 예배 안내

2026년 4월 5일 오전 11시

설교자: 안용성 목사

본문:   요한계시록 21:1-4

제목:   부활: 죽음을 대하는 태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