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설교요약]삼권분립이 이루어지지 않은 고대사회에서 재판은 통치 행위였다. 그래서 누가 누구를 재판한다는 것은 그 사람을 다스림을 의미한다. 비울은 그리스도인들 간의 소송을 사회 법정으로 가져가는 것을 심각한 문제로 진단하는 이유가 그것이다. 그래서 본문은 단순히 재판이라는 구체적 사례를 넘어 교회와 세상의 관계라는 좀 더 큰 주제로 우리를 이끌고 간다. 세상의 일상에 하나님의 주 되심을 이루기 위해 우리는 먼저 중립적 의미의 “세상”을 긍정해야 한다. 그러나 그것은 동시에 부정적 의미의 “세상,” 즉 파라오의 질서에 대한 저항이 되어야 한다. 그리스도인이 세상에서 선한 영향력을 행사하여 하나님의 주 되심을 이루고자 할 때, 그 리더십의 모델은 그리스도이다. 이제는 지식이 아니라 첫 걸음의 결단이 필요할 때이다. 실천으로 문제를 찾고 그 문제를 풀어나가자.
181014 “고린도전서(7) 하나님의 자리” (고전 3:5-9; 엡4:12-13)
[설교요약]그리스도인의 성장은 각자의 개별적인 성장일 뿐 아니라 모든 사람이 지체가 되어 함께 이루어가는 그리스도의 몸의 성장이기도 하다. 또 그 성장은 각 지체의 성장일 뿐 아니라 지체들 사이의 관계의 성장이기도 하다. 관계는 사람과 사람 사이에 있을 뿐 아니라 그 사람의 존재 속에도 있다. 그래서 교회의 성장은 관계의 성장이다. 그런데 이 성장은 우리의 수고와 노력만으로 이루어지지 않는다. 생명을 창조하시고 그 생명을 자라게 하시는 분은 하나님이시기 때문이다. 하나님께서 교회에 들어와 친히 일하시고 우리를 성장시키시도록 우리의 존재를 내어드려 하나님께서 일하실 자리를 만들자.
181007 고린도전서(6) 영에 속한 공동체 (고전 2:12 – 3:4)
[설교요약]성령께서 교회를 세우셨다. 이 말은 교회의 본질이 그리고 교회가 교회 될 수 있게 하는 동력이 성령 안에 있다는 뜻이다. 하나님은 초월자이시나 성령을 통해 교회의 현실이 되신다. 예수 사건은 과거에 일어났지만, 성령을 통해 그것이 오늘의 사건이 된다. 본문에서 바울은 고린도 교회로 하여금 영에 속한 공동체가 될 것을 촉구한다. 영에 속한 공동체란 세상의 영을 받지 않고 하나님의 영을 받은 공동체이다. 영에 속해 있음을 판별하는 기준은, 영적 능력이나 기능이 아니라, 오늘의 삶이다. 고린도 교회에는 문제들이 있었다. 그러나 성령은 그 문제들을 새로운 공동체의 기회로 삼으신다. 끊임없이 우리 자신을 내어 드려 성령의 지혜와 능력을 공급받는, 영에 속한 공동체가 되자.
180930 고린도전서(5) 부르심을 보라! (고전 1:26-28)
[설교요약]“부르심”(소명)이라는 말은 보통 사명과 관련하여 사용되지만, 본문에서는 우리를 불러 그리스도의 몸, 즉 교회를 이루게 하심을 가리킨다. 하나님은 “육신의 기준”으로 보아 어리석은 사람들, 힘 없는 사람들, 신분이 낮은 사람들을 부르셨다. “세상의” 약한 것들, 비천한 것들, 멸시받는 것들, 그래서 사회적 존재감이 낮은 사람들을 말이다. 그 기준으로는 감사하기 어렵다. 그러나 하나님의 부르심을 볼 때, 우리의 약함은 강함이 되며 우리의 어리석음은 진정한 지혜가 된다. 우리는 더 이상 이 세대의 기준으로 스스로를 판단하지 않는다. 그 때 우리에게는 감사할 일들이 너무 많아진다.
180923 고린도전서(4) 십자가의 지혜 (고전 1:18-21)
[설교요약]고린도전서의 윤리적 권면은 복음, 곧 십자가의 말씀에 근거한다. 문제의 핵심은 십자가의 말씀을 떠난 것이고, 문제 해결의 시작은 그 복음으로 돌아가는 것이다. 하나님은 십자가를 통해 믿는 이들을 구원하셨으나, 사탄은 그 지혜에 이르지 못했다. 사탄은 유대 지도자들과 로마 총독 빌라도를 움직여 예수를 죽였고, 그로써 하나님의 아들을 제거한 줄 알았겠지만, 그것은 오히려 하나님께서 죽음의 권세를 무너뜨리시는 방법이었다. 하나님께서 이 세대의 지혜를 어리석게 하신 것이다. 고린도 교인들이 이 세대의 지혜에 끌린 이유는 고린도의 시대적 산물인지도 모른다. 그것은 오늘 우리에게도 적용된다. 십자가의 말씀이 지혜가 되느냐 아니면 어리석은 것은 되느냐, 그것은 우리의 선택에 달려 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