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설교요약]창조 이야기는 고대의 우주관을 토대로 서술되었다. 돔 경기장의 천장과 같은 반구형의 궁창에 해와 달과 별들이 박혀 있다. 그 궁창 위에 물이 있어 때로 창문을 통해 비나 눈이 내린다. 과학은 시대적인 것이며, 언어와 문화와 함께 하나님의 진리를 계시하기 위해 사용하시는 그릇일 뿐, 그 자체가 성경이 말하고자 하는 진리는 아니다. 그러므로 성경을 과학 교과서로 읽으면 안된다. 창세기는 “무로부터의 창조”를 말하지 않는다. 창세기의 관심사는 물질의 창조가 아니기 때문이다. 그것은 혼돈으로부터 샬롬의 창조이다. 우리가 하늘의 창조에서 배우는 것은 허공에도 뜻이 있다는 것이다. 창조는 채움이면서 동시에 비움이다. 샬롬은 채워짐이기도 하고 비워짐이기도 하다.
200628 창세기(3) 땅의 샬롬 (창 1:9-13)
[설교요약]창조 이전의 혼돈을 묘사하는 창세기 1장 2절에서 땅은 어둡고 물로 덮여 있었다. 그 땅의 혼돈을 샬롬으로 바꾼 것이 창조이다. 둘째 날 하늘 위의 물과 하늘 아래의 물을 나누셨으나 아직 하나님이 보시기에 좋지 않았다. 혼돈의 물이 여전히 땅을 뒤덮고 있었기 때문이다. 창조의 목표는 땅이다. 물이 자리를 비켜 땅이 드러나니 비로서 하나님이 보시기에 좋았다. 하늘도 땅을 위해 존재한다. 낮과 밤은 땅에 이루어지는 것이며, 해와 달과 별은 땅에 시간을 알리고 땅을 비추기 위해 창조된 것이다. 하나님은 땅 위의 식물들을 사람과 동물에게 나누어 먹으라고 주셨다. 그 샬롬이 하나님이 보시기에 참 좋았다. 창조 이전에 물이 땅을 덮듯 오늘날 인류가 땅을 덮고 있다. 코로나19로 인해 인류가 자연에게 자리를 비켜주니 샬롬이 회복되고 있다. 우리는 하나님의 새 창조에 어떻게 참여할 수 있을까?
200621 창세기(2) 어둠과 물 (창 1:3-8)
[설교요약]창조의 과정에서 하나님은 혼돈의 어둠과 물을 나누셨다. 어둠과 바다 물은 성경에서 종종 악의 상징으로 사용된다. 바다가 악을 상징하는 것은 고대 근동 신화의 관습이기도 하다. 리워야단, 탄닌, 라합 같은 바다 괴물들은 이러한 상징적 성격을 대변한다. 그러나 창세기 1:21은 하나님께서 다섯째 날에 탄닌들을 창조하셨다고 말한다. 바다 괴물들을 비신화화 하여 모든 창조세계가 하나님의 주 되심 아래 있음을 보여주는 것이다. 어둠과 물은 혼돈의 주역이 될 수도 있지만, 그것들이 경계 안에 머물기만 하면, 밤은 아름답고 물은 유익하다. 하나님은 그렇게 우리가 감당할 수 있는 만큼 주신다. 우리도 자연의 경계를 지켜 창조세계의 보전에 일조해야 한다.
200614 창세기(1) 창조의 혼돈 (창 1:1-2)
[설교요약]창세기 처음 몇 절의 구문관계에 대해 다양한 해석이 있다. 그 해석들의 공통점은 하나님께서 빛을 창조하시기 전 땅은 형태가 없고 텅 비어 있었다는 것이다. 땅 속 저 아래에 있어야 할 깊음의 물이 지표면 위를 덮고 있었고, 어둠이 그 위에 있었다. 그리고 하나님의 영이 그 물 위에 움직이고 계셨다. 오늘 우리는 혼돈의 시대를 살아간다. 이 혼돈 속에서 우리가 희망을 가지는 것은 하나님의 영이 칠흙같은 혼돈의 물 위에 움직이고 계시기 때문이다. 하나님은 이 혼돈 속에서 무형의 진흙같은 우리를 빚으실 것이다. 창조의 주체는 주님이시다. 새 창조에도 하나님은 우리를 사용하실 것이다. 겸손히 쓰임 받자.
200607 세 분이 뭘 하시나 (요 14:16-20)
[설교요약]삼위일체 신앙이 정립되기 전에 삼위일체 하나님에 대한 경험이 있었다. 그 경험이 성찰의 과정을 거쳐 하나의 교리로 정립된 것이 삼위일체론이다. 그 신앙 경험의 본질은 하나님을 우리에게 가까이 다가오시는 분으로 만난 것이다. 사람이 되어 내 눈높이에 오신 하나님이 예수님이라면, 성령은 내 속으로 들어오신 하나님이다. 하나님은 예수를 통해 나를 친구 삼으시고, 성령을 통해 나와 하나 되신다. 그 하나님을 경험하자. 우주를 품은 거대한 원과 같은 하나님이 먼지와 같은 나에 주목하시듯, 우리도 그 마음으로 창조세계를 대하자. 나를 친구 삼으로신 예수의 마음으로 이웃을 대하고, 나를 보살피시는 성령의 세밀함으로 나 자신을 사랑하자.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