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설교요약] 사랑을 뜻하는 헬라어 아가페는 동시에 초대교회의 애찬을 가리키는 말이기도 했다. 고린도전서 13장이 보여주는 사랑 곧 아가페의 길은 우리교회의 애찬 곧 아가페가 나아갈 길이기도 하다. 사랑은 오래 참는다. 잘하는 사람이 못하는 사람을 참아주어야 한다. 사랑은 친절하다. 수고한 봉사자들에게 감사를 표현하는 친절을 잊지 말자. 시기하고 뽐내고 교만한 것은 비교에서 시작된다. 다른 조와 비교하지 말자. 사랑은 무례하지 않다. 무례함이란 다른 사람의 사랑을 강요하는 것이다. 사랑은 자기의 방식을 고집하지 않는다. 애찬을 어떤 방식으로 하느냐보다 더 중요한 것은 애찬에 어떻게 사랑을 담아내느냐이다. 사랑은 서로를 믿어주며 같은 목표를 바라보며 같은 소망을 품는 것이다. 더 성숙한 그루터기교회를 함께 소망하며 애찬에 함께 사랑을 담아보자.
181111 고린도전서(11) 그리스도의 몸의 함의 (고전 12:11-37)
[설교요약]교회는 그리스도의 몸이다. 공동체를 몸에 비유하는 것은 바울 당시 고대 로마 사회에서도 종종 볼 수 있었다. 그 비유는 주로 사회적으로 낮은 계급의 사람들로 하여금 계급 질서를 받아들이고 순응하게 하기 위해 사용되었다. 그러나 바울은 그와 다른 방식으로 몸의 비유를 사용한다. 고린도전서의 비유는 공동체의 다양성과 각 지체들의 가치를 강조하며, 교회 내의 영향력 있는 사람들과 높은 계급의 사람들을 향한다. 주목할 것은 바울이 교회를 그리스도와 동일시한다는 점이다. 하나님이 예수를 통해 성육신 하셨듯이, 오늘날은 교회를 통하여 자신을 드러내신다. 과거에 그리스도께서 하셨던 일을 지금은 교회가 하도록 기대된다. 그것은 하나님의 나라를 말로 선포하며 교회의 삶으로 하나님의 나라를 보여주는 것이다. 그것은 교회 내에 존재하는 파라오의 질서에 대항하는 일로부터 시작된다.
181104 “고린도전서(10) 주님의 만찬” (고전 11:17-34)
[설교요약]성찬성례전의 제정사로 많이 사용되는 고린도전서 11:23-26은 본래, 예전화 된 성찬이 아니라, 고린도교회의 애찬에 적용된 말씀이다. 바울은 애찬을 “주님의 만찬”이라 부르며, “그리스도의 몸의 코이노니”와 “그리스도의 피의 코이노니아”로 여긴다. 그러나 고린도교회에서는 그 코이노니아가 오히려 분열의 씨앗이 되고 있었다. 그것은 부자들과 가난한 사람들 사이에서 일어난 차별인데, 애찬을 할 때 집 주인과 부자들은 트리클리니움에 둘러앉아 좋은 음식과 술을 나누고 가난한 사람들은 아트리움에 서서 빈약한 음식을 나누거나 아예 굶기까지 하는 일들이 일어나고 있었던 것이다. 애찬이란 단지 배고픔을 해결하기 위한 것이 아니다. 애찬은 그리스도의 몸과 피를 나누는 것이기 때문이다. 우리가 먹는 것이 곧 우리의 존재이다. 그래서 우리는 그리스도의 몸이 된다.
181028 “고린도전서(9) 교회와 세상2” (고전 6:1-4)
[설교요약]예수님은 왜 아직 안 오실까? 많은 경우, 이 질문의 배경에는 세상이 악해져 가고 우리는 그 악한 세상의 피해자라는 생각이 암시되어 있다. 과연 그럴까? 기독교가 로마의 국교가 된 후 최근까지 기독교인들은 유럽과 미국과 전세계의 지배자였다. 세상이 갈수록 악해지는 것은 기독교인들이 힘을 가지지 못해서가 아니다. 힘이 있으나 파라오의 질서를 따라 잘못 사용했기 때문이다. 예수님이 오시는 것은 파라오의 질서를 심판하시기 위함인데, 지금 오신다면 누구를 심판하셔야 할까? 예수님도 난감하시지 않을까? 종교개혁의 정신은 “아드 폰테스”(Ad Fontes), 우리 신앙의 근원으로 돌아가는 것이다. 회개하는 것이다. 개혁의 시기에는 눈을 열고 귀를 기울여 주님의 계시를 얻기에 힘써야 한다. 복음을 알기에 힘쓰고, 그 복음에 비추어 자신과 교회를 철저히 성찰하자.
181021 “고린도전서(8) 교회와 세상” (고전 6:1-4)
[설교요약]삼권분립이 이루어지지 않은 고대사회에서 재판은 통치 행위였다. 그래서 누가 누구를 재판한다는 것은 그 사람을 다스림을 의미한다. 비울은 그리스도인들 간의 소송을 사회 법정으로 가져가는 것을 심각한 문제로 진단하는 이유가 그것이다. 그래서 본문은 단순히 재판이라는 구체적 사례를 넘어 교회와 세상의 관계라는 좀 더 큰 주제로 우리를 이끌고 간다. 세상의 일상에 하나님의 주 되심을 이루기 위해 우리는 먼저 중립적 의미의 “세상”을 긍정해야 한다. 그러나 그것은 동시에 부정적 의미의 “세상,” 즉 파라오의 질서에 대한 저항이 되어야 한다. 그리스도인이 세상에서 선한 영향력을 행사하여 하나님의 주 되심을 이루고자 할 때, 그 리더십의 모델은 그리스도이다. 이제는 지식이 아니라 첫 걸음의 결단이 필요할 때이다. 실천으로 문제를 찾고 그 문제를 풀어나가자.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