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경통독] 예레미야서 1-21장 (9월 20일–26일)

카테고리: 성경공부

유다 멸망에 대한 예언

북이스라엘의 멸망을 본 이사야는 안타까운 마음으로 예언했지만, 남유다는 말씀을 듣고 돌아오지 않았습니다. 요시야 왕의 개혁에도 남유다는 쇠락의 길로 접어듭니다. 예레미야는 바로 이 시기에 요시야 왕부터 마지막 왕까지, 즉 남유다가 바빌로니아에 의해 멸망할 때까지 사역합니다. 그는 온몸으로 하나님의 말씀을 받아 자기 삶으로 증거했던 선지자입니다. 무엇보다 그는 유다의 멸망을 눈으로 보면서 찢어지게 아픈 마음으로 자기 백성에게 멸망의 소식을 전해야만 했습니다. 선지자는 더 이상 회복 불가능한 자기 백성의 영적 상태에 절망하지만, 그들 스스로 돌이킬 수 없음을 알고 하나님께서 새 언약을 주십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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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암담한 유다의 미래 예레미야서 1-9

예레미야는 앞서 말한 대로 남유다의 마지막 네 왕 때 사역한 선지자입니다(요시야 BC 640-609, 여호야김BC 605-598, 여호야긴 BC 598-597, 시드기야 BC597-586). 통치연도에서 보이는 것처럼 요시야 왕 이후에 나라가 급격히 기우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선지자로서 예레미야가 겪은 가장 힘들었던 부분은 이처럼 이미 확정된 멸망을 예언해야 했던 것입니다.

살구나무 비유와 끓는 가마 비유는 돌이킬 수 없는 멸망을 비유적으로 말씀하신 것입니다. 히브리어로 살구나무(음역하면 샤케드’)는 지킨다(샤카드)는 뜻의 동사와 발음이 거의 비슷합니다. 하나님은 자신이 말씀하신 것을 지키시는 분(쇼케드)이라고 단언하십니다(1:11-12). 하나님이 반드시 지키겠다고 하신 것은 바로 북쪽에서부터 끓는 가마의 물이 쏟아지는 것입니다. 이것은 곧 바빌로니아를 통한 심판을 상징합니다.

예레미야가 소명을 받던 해(BC 626)에 나보폴라살이 바빌로니아를 세웠습니다. 이후 BC 612년 앗시리아를 무너뜨렸고, 이집트는 앗시리아를 도와 팔레스타인 지역에 영향력을 행사하기 위해 바빌로니아에 맞서려고 올라갑니다. 이때 요시야 왕은 바빌로니아 편에 서서 이집트를 막으려다가 전하고 맙니다(BC 609, 대하35:20-24). 이집트 왕 느고는 이후 BC 605년에 갈그미스 전투에서 바빌로니아에게 지고, 팔레스타인의 패권을 바빌로니아에게 내주게 됩니다.

이처럼 하나님의 심판이 확정된 이유는 유다가 음란하듯 우상을 섬겨 화를 자초했으며, 그나마 남아 있는 몇 가지 가능성마저 스스로 포기했기 때문입니다(4:4). 요시야의 개혁이 있었으나 유다 백성들은 그저 겉으로 시늉만 했을 뿐 마음으로 이르는 회개를 하지 않았습니다. 그것은 결혼한 아내가 겉으로는 아무 문제 없이 부부 생활을 하는 것 같으면서도 남편 모르게 부정을 행하는 것과 같습니다(3:6-10).

더욱이 하나님은 북이스라엘을 통해 실물 교훈을 주셨지만, 남유다는 이것도 무시했습니다. 안타까운 선지자는 성전 문에 서서 외치지만, 그들은 자식을 번제로 드리면서까지 우상숭배를 그치지 않았습니다. 지도자들은 말씀을 무시하고 선지자들을 죽였습니다(6:16-17, 26:23). 하나님은 선지자에게 차라리 더 이상 외치지도 말고 그들을 위해 기도하지도 말라고 하십니다. 이 암담한 현실 앞에서 예레미야는 울지 않을 수 없었습니다.

2. 회개를 거절하는 유다와 거짓 선지자들 예레미야서 10-21

예레미야는 신실하게 하나님의 말씀을 외쳤습니다. 허리띠 비유를 위해 바빌로니아까지 오갔습니다. 더 이상 번성치 못하고 열매 맺지 못하는 이스라엘을 상징하기 위해 장가도 안 가고 홀로 지내야 했습니다. 이토록 신실하게 말씀을 전했지만 돌아오는 것은 질시와 배반과 핍박뿐이었습니다.고향 친척과 친구들이 먼저 그를 죽이려고 했고, 제사장이요 선지자라고 하는 자들이 그를 해하려고 했습니다.

이렇듯 유다는 더 이상 희망이 없는 상태가 되었습니다. 모세 언약은 회복될 기미가 전혀 보이지 않았습니다. 유다 백성들이 하나님을 배반하고 우상숭배에 빠져서 더 이상 그 땅에 거할 수 없게 되었기 때문입니다. 그 악이 이전 가나안 일곱 족속보다 더 심해서 하나님은 심판을 돌이키실 수가 없었습니다. 이런 상황에서 예레미야 선지자는 그저 하나님의 은총을 구하며 울 수밖에 없었습니다.

지식 In 실로의 회막과 예루살렘의 성전

실로는 여호수아가 가나안 땅을 점령한 뒤 처음으로 여호와의 궤를 안치하고 다스렸던 곳입니다. 그러나 그곳에서 엘리의 두 아들 홉니와 비느하스가 하나님을 섬기기는커녕 이름을 욕되게 하여 결국 그 집에서 제사장이 끊어지는 저주를 받게 됩니다(왕상 2:27에서 이뤄짐).

실로는 다윗이 법궤를 예루살렘으로 옮겨 가면서 유명무실한 곳이 되었습니다. 실로는 여호수아가 속한 에브라임 지파에 있었고, 에브라임은 곧 북이스라엘을 대표합니다. 실로와 에브라임의 운명은 곧 앗시리아에 의해 멸망한 북이스라엘을 대변합니다.

하나님이 높임을 받으셔야 할 성전과 예루살렘에서 반대의 일이 일어나자 선지자는 예루살렘이 실로와 똑같은 운명에 처하고, 유다 역시 이스라엘과 같은 운명에 처할 것이라고 예언합니다.

< 20일 주일: 예레미야서 1-3장 자초한 심판 >

유다 백성이 처한 위기는 자초한 것입니다. 그들의 죄성이 스스로 하나님을 배반한 것입니다(2). 또 하나는 그들이 이스라엘의 멸망을 눈앞에서 봤으면서도 여전히 영적 간음을 버리지 않은 것입니다(3). 이것은 타락한 인간이 얼마나 고집스럽게 악을 행하는지를 보여 줍니다. 인간은 본질적으로 내재되어 있는 죄성을 악을 행합니다. 더 큰 문제는 선지자를 보내 말씀을 주고, 주변의 여러 가지 상황을 통해 바로 코앞에 들이밀어서 보여 주듯 경고하시는데도 악한 길에서 돌아서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선지자는 이스라엘의 어리석음과 그들이 자초한 심판 때문에 안타깝게 부르짖지만 하남의 심판은 이미 결정되었습니다. 아직도 돌이킬 여지는 남이 있지만 말입니다(5:1 참조).

나는 어떻습니까? 최근에 하나님을 섬기겠다고 한 결심과는 달리 하나님을 떠나 멀리 가 있지는 않습니까? ‘매를 맞을 때까지 깨닫지못하는 사람은 아닙니까? 오늘도 말씀을 듣고 혹시라도 내가 돌이켜야 할 것은 없는지 살펴봅시다.

< 21일 월요일: 예레미야서 4-6장 먼저 가시덤불을 걷어 내고 >

근본적인 원인을 해결하지 않고 땜질처방을 하는 것은 문제만 악화시킵니다. 가시덤불 속에 씨를 뿌리면 처음에는 자라는 듯하다가 그만 사그러 들고 마는 것과 같습니다. 근본적인 문제는 이스라엘이 하나님을 떠나고, 마음속에 우상, 즉 세상의 가치관을 심어 놓고 그것을 음란하게 섬기는 것입니다. 그래서 선지자는 너희 마음 가죽을 베라고 단언합니다. 의식적인 할례가 하나님의 백성이 되게 할 수 없습니다. 세상 가치관에 절어 있으면서 겉으로만 교회에 출석하고 헌금을 한다고 하나님의 백성이 될 없습니다. 온갖 불의와 사회의 구조적 악에 동참하고 그것을 조장하면서 주일에만 신자가 될 수 없습니다. 선교한다고 말할 수 없습니다. 오늘 내 마음에서 갈아엎어야 할 묵은 것은 무엇입니까? 잘라 내야 할 생각과 가치관, 구습은 무엇입니까?

< 22일 화요일: 예레미야서 7-9장 참 성전에 거하시는 하나님 >

실로에 있던 성막이 유명무실해진 것도, 이스라엘이 앗시리아에 의해 망한 것도 모두가 마땅히 있어야 할 것들이 없었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이 이름을 두신 곳에서 그 이름이 영광을 받기는커녕 짓밟히고 버려졌기 때문입니다. 이제 예루살렘 성전도 그와 같이 되었습니다. 결과는 하나님이 떠나시는 것이며, 성전은 버림받고, 예루살렘과 유다는 황폐해집니다. 하나님이 높임을 받으시는 일이 행해지지 않는 교회는 껍데기, 바람에 날아가는 겨와 같습니다. 하나님이 원하시는 공의와 긍휼과 신의가 성전인 우리 안에 있습니까? 길과 행위를 바르게 하는 곳이 하나님의 성전이 되고,우리는 그 곳에서 하나님의 함께 하심을 맛볼 것입니다.

< 23일 수요일: 예레미야서 10-12장 나의 죄성을 깨달아야 할 때 >

예레미야의 설교에 아나돗 사람들이 들고 일어났습니다. 자신들의 출신(조상 아비아달)에 대해 부정적인 발언을 일삼았기 때문입니다(7:12-15참조). 예레미야는 자신의 출신을 통해, 또한 자기 고향 사람들을 통해 하나님의 뜻을 발견해야만 했습니다. 하나님을 저버려서 버림받은 제사장 가문, 하나님의 말씀을 듣고도 돌이키지 않고 고집을 부리는 자기 고향 사람들을 보았습니다. 예레미야는 그들을 통해서 자기 백성의 죄악을 보았고, 철저하게 자기 백성을 대적하는 예언을 해야 했습니다. 바로 여기에 선지자의 아픔과 고통과 눈물이 있었습니다.

참된 말씀은 스스로의 죄악과 무능, 죄성의 깊은 뿌리를 발견한 사람에게서 선포됩니다. 나를 힘들게 하는 주변 사람들에게서 무엇을 발견합니까? 내게 상처를 주는 사람들에게 어떤 자세를 보입니까? 나 자신의 죄성을 더 깊이 깨달아야 합니다. 주님이 요구하시는 자세는 바로 이런 것입니다(12:5 참조).

< 24일 목요일: 예레미야서 13-15장 회복하기 어려운 문제 앞에서 >

예레미야의 기도는 광야의 금송아지 사건 이후 이스라엘 백성을 위해 기도하던 모세의 모습과 같습니다. 안타까운 것은 모세의 기도에 긍정적으로 답하셨던 하나님께서 이번에는 예레미야의 기도를 전혀 들어주지 않으신 것입니다. 상징적으로 모세에서부터 이어져 온 민족의 언약이 이제 더 이상 회복하기 어려운 수준으로 타락하고 말았음을 뜻합니다. 그 예로 하나님은 므낫세 때의 배교를 드십니다. 성경은 배교의 수준이 이전에 그로 인해 멸망했던 이방 민족보다 더하다고 말하고 있습니다(왕하 21:9). 언약의 말씀에 약속된 축복과 저주에서(11:26, 30:19), 저주가 분명하게 드러난 것입니다.

이스라엘의 역사를 통해서 다시금 우리 자신의 타락한 모습이 어떠한지를 발견하게 됩니다. 이제 하나님이 구원해 주시는 것 외에는 달리 방법이 없습니다. 그래서 선지자는 구하지 말라는 하나님의 말씀에도 하나님께 그 백성을 대신하여 아파하며 울고 있는 것입니다. 오늘 내게 닥친 도저히 불가능한 일들, 죄 때문에 회복하기 어려운 문제를 두고 하나님의 전적인 은혜를 구합시다.

< 25일 금요일: 예레미야서 16-18장 교만을 썩게 하시는 하나님 >

우상숭배의 양상은 인간숭배와 다르지 않습니다(17:1-11). 우상을 섬기는 자는 모든 것을 자기 욕심대로 구하고 우상이 들어줄 것을 요구하기 때문입니다. 곧 자기 욕심을 섬기고, 사람들과 모략을 의지합니다. 이것이 바로 교만의 핵심입니다. 하나님은 허리띠가 썩게 하듯 이스라엘이 바빌로니아에 포로로 가 있는 동안 그들의 교만을 썩게 하실 것입니다(13장 참조). 그러나 하나님을 섬기고 의지하는 자는 18장 말씀처럼 하나님의 주권을 인정합니다. 또한 하나님이 그 뜻대로 행하는 분(토기장이 하나님)임을 압니다. 그래서 선지자는 하나님이 높은 보좌에 앉으신 통치자, 우리를 거룩하게 하시는 분임을 소망으로 고백하는 것입니다(17:12-13).

혹시 어려움에 신음하고 있다면 주께서 내 교만을 썩게 하고 계심을 알고 감사해야 합니다. 오늘도 선지자처럼 하나님을 고백하며, 내 삶의 문제를 그분의 주권과 기쁜 뜻대로 행하여 달라고 구합시다.

< 26일 토요일: 예레미야서 19-21장 토해 내지 않고는 견딜 수 없는 열정 >

예레미야는 친족과 지도자, 선지자에게 핍박을 받고 숱한 권력과 돈의 매수에 시달립니다(20:7-10). 사람들은 조롱과 멸시로 일관합니다. 오죽했으면 태어난 날을 저주했겠습니까! 너무나 힘든 예레미야 선지자는 차라리 하나님의 말씀을 전하지 않는다면 이런 일이 없겠다고 생각하며 포기하려고 합니다. 그러나 하나님이 그 곳에 넣어 주신 말씀은 그야말로 불입니다. 토해 내지 않고는 견딜 수 없는 뜨거운 열정입니다. 결국 선지자는 주께서 함께하심을 믿고, 중심을 보는 하나님이 보수해 주시길 기도합니다.

어렵고 힘든 환경도, 유혹과 조롱도 우리가 가는 이 소명의 삶을 그치게 할 수 없습니다. 주님이 주신 불이 우리 속에 있으며, 그 불을 주신 주께서 오늘도 우리와 함께하시기 때문입니다. 혹시 믿음의 길에서 실망하거나 좌절해 포기하려던 마음은 없습니까? 내 안에 불을 주신 하나님, 함께하시는 그분께 오늘도 내 문제를 올려 드립시다.

조한진
Author: 조한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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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일 예배 안내

2024년 4월 28일 오전 11시

설교자: 안용성 목사

본문:   골로새서 1:15-20

제목:   거룩한 공교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