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도행전

160918 그것이 그런가 하여

[설교요약]
사도행전을 보면, 바울이 가는 곳마다 유대인들이 복음을 반대하며 소동을 일으키곤한다. 그러나 그들이 모든 유대인을 대표하는 것은 아니다. 왜냐하면 유대인들 가운데서도 많은 사람들이 적극적으로 복음을 받아들였기 때문이다. 예루살렘 교회가 그렇고 베뢰아의 유대인들이 그렇다. 바울은 성경을 해석하고 예수가 그리스도이심을 입증하며 유대인들과 토론했다(행 17:2-3). 이에 대해 어떤 유대인들은 귀를 막고 소동을 일으키며 거부했으나, 베뢰아의 유대인들은 그것이 정말 그런지 검증하기 위해 성경을 다시 읽었다. 그리고 매일 그 말씀을 묵상하여 그 말씀으로 자신들의 신앙과 삶을 검증했다. 그리하여 그들은 구원사의 변곡점에서 하나님과 함께 갈 수 있었다.

160911 세상을 뒤집는 사람들

[설교요약]
데살로니가에서 바울의 복음 전도를 방해한 유대인들은 그리스도인들을 가리켜 세상을 뒤집는 자들이라 하며, 그리스도인들이 황제를 거슬러 행하고 예수라는 다른 왕을 따른다고 고발했다. 그것은 빌라도의 법정에서 예수를 고발한 산헤드린의 재연이며(눅23:1-5), 빌립보에서 여종의 주인들이 바울을 고발한 것과도 통한다(행 16:19-21). 그것은 악의적인 왜곡이지만, 동시에, 하나님 나라의 본질을 잘 드러내어 준다. 왜냐하면 기독교 신앙은 단지 종교예식이나 교리들의 모음이 아니라, 세상을 변화시키는 새로운 생활방식이기 때문이다. 그리스도인들은 파라오의 질서를 뒤집어 하나님의 나라로 만드는 사람들이다.

160904 특권적인 도시

[설교요약]
빌립보는 콜로니아로서 로마제국의 특권적인 도시였다. 이 도시의 시민들이 향유하는 특권의 이면에는 사람이면서 사람 대접을 받지 못하는 사람들이 있었다. 하나님 나라의 복음이 선포되었을 때, 그 복음은 이 도시의 삶의 방식을 흔들었다. 그리고 그들은 전도자 바울과 실라를 위험한 존재로 간주하여 박해했다. 바울의 고난목록에는 동족의 위험과 이방인의 위험이 있다. 동족의 위험이 복음과 전통이 충돌할 때 오는 것이라면, 이방인의 위험은 복음이 현실적 이익과 충돌할 때 오는 것이다. 이방인으로부터 오는 것이며 동시에 우리가 이방인으로 대우 받는 것이다. 파라오의 질서에 속한 사람들에게 하나님 나라의 백성은 이방인일 수밖에 없다.

160828 뜻대로 되지 않을 때

[설교요약]
사도행전의 전도자들도 늘 하나님의 음성을 분명히 들었던 것은 아니다. 그들에게도 짙은 안개 속을 걷는 듯한 어두움의 기간이 있었다. 바울은 제2차 전도여행 초기 아시아로 가려 하다가 성령이 막으셔서 브루기아와 갈라디아의 시골 길을 방황하고, 또 비두니아로 가려 하다가 예수의 영이 허락하지 않으셔서 드로아로 걸음을 돌리는 암중모색을
반복한다. 그러나 드로아에서 마케도니아 사람의 환상을 본 후 그 모든 일들이 하나님의 부르심의 과정이었음을 깨닫게 된다. 아시아에 가는 것이 하나님의 뜻이 아니었던 것은 아니다. 단, 아직 때가 아니었을 뿐이다. 그 어두움의 기간, 바울은 성실하게 자신에게 주어진 길을 걸었다.

160821 신뢰의 위기

[설교요약] 교회 내에도 의견 대립이 있고 싸움이 있으며 결국 서로 갈라서는 일도 일어난다. 바울과 바나바가 제2차 전도여행에서 서로 다른 길을 간 것은 그러한 수많은 사례를 가운데 하나일 뿐이다. 아마도 예루살렘 사도회의(행 15장; 갈 2:1-10) 직후에 벌어진 것으로 보이는 안디옥 사건(갈 2:11-14)이 두 사람 사이에서 신뢰의 위기로 작용했을 가능성이 있다. 그러나 두 사람은 그런 헤어짐 속에서도 서로를 향한 신뢰를 포기하지 않았다. 그래서 바울은 그 후에도 바나바를 모범적인 사역자로 평가하며(고전 9:6), 마가를 그 곁에 두고 싶어한다(딤후 4:11). 교회는 그러한 신뢰를 통해 그리스도의 몸으로, 신실한 사람들의 모임으로 세워져 간다.

160807 하나일 뿐입니다

[설교요약]
교회의 일원이 된 이방인도 유대인과 동일하게 할례를 받고 율법을 지켜야 하는가? 한편에는 이방인들이 이제 하나님의 언약 백성의 일원이 되었으므로 언약의 표지인 할례와 율법을 지키는 것이 당연하다는 입장이 있었다. 반대 편 입장은 그럴 필요가 없다는 것이었다. 양측은 토론을 통해 타협안을 도출한다. 전자는 생각을 바꾸어 과감하게 자신들의 입장을 포기했고, 후자는 유대인들의 자부심과 관습을 배려하여 네 가지 금령을 받아들였다. 그럴 수 있었던 것은, 양편 모두 자신들의 생각은 그저 가능한 많은 생각들 가운데 하나일 뿐임을 인정했기 때문이다. 그리고 하나님의 진리는 늘 사람의 생각을 넘어서 있음을 잊지 않았기 때문이다. 그것이 교회가 반드시 갖추어야 할 겸손이다.

160724 전도자 바울

[설교요약]
사울이 회심할 때, 하나님은 그에게 소명을 주시며 두 가지를 예고하셨다. 그는 유대인과 이방인에게 복음을 전할 것이다. 그는 예수의 이름을 위해 고난 받을 것이다. 첫째 측면에서, 사도 바울은 이방인과 유대인에게 전도할 때 서로 다른 방법을 사용했다. 그것은 수용자 친화적인 계시의 원리를 따른 것이다. 둘째 측면에서, 그는 예수를 위해 당하는 고난을 당연한 것으로 받아들였다. 왜냐하면 전도란 하나님 나라의 복음을 전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전도란 하나님 나라를 확장하는 것이다. 그것은 교세의 확장과 같을 수도 있고 다를 수도 있다. 만일 교세의 확장이 하나님 나라가 아닌 파라오의 질서와 같이 같다면, 그리고 전도가 그런 확장에 이바지한다면, 그것은 전도가 아니라 반 전도이다.

160717 사도행전과 현실

[설교요약] 온전히 성령에 이끌려 살아간 사도행전의 제자들의 삶을 우리의 현실에 적용하고자 할 때 현실과의 괴리가 발견된다. 먼저 사도행전에는 뚜렷한 선과 악의 이분법이 나타나는데, 그것은 모든 역사문학이 그렇듯, 사도행전도 이야기의 관습을 따르고 있기 때문이다. 그 이분법을 현실에 그대로 적용하면 안된다. 또 다른 문제는, 성령에 이끌려 살려면 하나님의 뜻을 분명히 알아야 할텐데, 주님께서 우리에게는, 사도들에게 말씀하신 것처럼, 선명하게 말씀하시지 않는다는 것이다. 그것은 우리의 존재가 방송장비의 앰프나 뉴터와 같은 역할을 하기 때문이다. 기도의 두 가지 목적은 (1)하나님의 음성을 들어 그분의 뜻을 아는 것이고, (2)그럴 수 있도록 우리의 존재를 변화시키는 것이다.

160710 헤롯 아그립바 1세

[설교요약] 헤롯 아그립바 1세는 로마황제 칼리귤라와 클라우디우스의 지원을 받아 팔레스타인 전역을 다스린 막강한 왕이었다. 게다가 그는 유대인 어머니 미리암의 배경을 입고 유대교인으로 행세하여, 유대인들의 지지까지 받았다. 그가 사도들을 죽인 것은 그러한 유대교적 경건을 시위하려는 행동이었다. 그러나 하나님이 그를 직접 손 보셨다. 그리고 사도행전 8-12장의 흩어진 사람들의 이야기는 그의 죽음으로 마무리된다. 하나님은 악을 선으로 바꾸시는, 간접적이고 역설적인 방법으로도 역사에 개입하시지만, 이렇게 직접적이고 전면적으로 개입하셔서 종말에 이루어질 하나님의 나라를 미리 보여주기도 하신다. 그러한 하나님은 우리의 평범한 일상에서도 주님의 나라를 이루신다.

어린이주일 온가족연합예배 안내

2024년 5월 5일 오전 11시

설교자: 김한별 전도사(아동부)

본문:   디모데후서 2장 20-21절

제목:   하나님이 사랑하시는 그릇