말씀

210509 창세기(40) 언약 백성의 삶 (창 15:13-16)

[창세기 15장 13-16절] 창세기 15장에서 아브람과 언약을 맺으시면 하나님은 아브람의 자손이 이집트의 나그네가 되고 종이 되어 사백 년간 괴로움을 받게 될 것이라 예고하신다. 언약에 따른 축복이 기대되는 지점에 너무 당황스러운 말씀이 아닌가? 그렇지 않다. 하나님은 가나안 부족들의 타락을 내다보시고 적절한 시점에 아브람을 부르시며 그의 자손을 큰 민족으로 만드시되 비옥한 이집트 땅을 못자리로 삼고자 하신 것이다. 그리고 사백 년 후에 모내기가 이루어질 것이다. 그러한 이스라엘의 삶에는 풍요와 고난이 함께 있었다. 하나님은 그러한 그들의 삶을 통해 인류의 구원을 향한 그분의 뜻을 이루어가셨다.

210502 창세기(39) 언약의 땅 (창15:7-21)

[설교요약]요나의 이야기에서 요나는 하나님의 구원이 유대인에 한정된다고 믿는 배타적 민족주의자들을 대표한다. 유대인들의 그러한 배타성은 언약 백성 됨에 대한 오해에서 비롯되었다. 그와 비슷한 현상이 언약의 땅에 대해서도 일어났다. 언약의 땅은 언약 백성의 사명을 위해 주어진 것이다. 그것은 온 인류의 구원을 위해 이스라엘이 이방인의 빛이 되는 것이다. 하나님은 옛 가나안 부족들의 죄악이 넘쳐 그들을 그 땅에서 쫓아내시고 이스라엘을 심으셨다. 창세기 15장은 사백년 전에 그 일을 예고한다. 이것은 이스라엘의 가나안 점령을 정당화하는 것이 아니다. 왜냐하면 이스라엘이 그 땅을 더럽힐 때 그들도 그 땅에서 쫓겨날 것이기 때문이다(레위기 18:24-30; 신명기 4:25-27).

210425 창세기(38) 신실하신 하나님 (창 15)

[설교요약]창세기 15장의 언약 장면은 아브람의 이야기 전체의 맥락에서 읽어야 한다. 12장에서 하나님이 아브람에게 언약을 제안하시고, 아브람은 그 제안을 받아들여 고향 땅을 떠나 주님을 향한 신실함을 지켜왔다. 하나님은 그 신실함(믿음)을 그의 의로 여기셨다(15:6). 그리고 하나님은 15장의 언약에서 아브람을 향한 신실함을 지키실 것을 다시 확인해 주신다. 주님은 그에게 자손과 땅을 다시 약속하시며, 쪼개 놓은 짐승들 사이를 홀로 지나가시는 언약 행위를 통해 그분의 신실함을 확인해 주신다. 아브람은 신실하신 하나님을 믿었고, 하나님께 신실함을 지켰다.

210321 창세기(35) 약속의 땅을 얻는 법(창14장)

[설교요약]창세기 14장에는, 앞뒤에 나오는 작은 이야기들과 달리, 비옥한 초승달지대의 정치상황을 한 눈에 보여주는 듯한 큰 이야기, 왕들의 전쟁 이야기가 담겨있다. 아브람의 조카 롯은 이 사건의 동인이지만 중요하게 다루어지지 않는다. 고대 왕정사회에서 왕은 땅의 소유자이며 그들의 전쟁은 땅의 확보와 관련되어 있다. 그러나 본문은 땅의 소유자가 하나님이심을 보여준다. 아브람은 강대국 연합군을 격퇴할 만한 무력을 가지고 있지만 땅의 소유권을 주장하지 않는다. 그는 복의 근원이 됨으로 약속의 땅을 얻고자 한다.

201122 그리스도로 옷 입은 교회 (갈 3:26-28)

[설교요약]
우리 모두는 하나님의 자녀들이며 그리스도로 옷 입은 사람들이다. 옷은 사회적 신분의 상징으로, 유대인과 이방인, 종과 자유인, 남자와 여자를 구별한다. 그러나 이제 우리는 그리스도로 옷입은 자들이 되었다. 우리는 하나님의 자녀들이다. 자녀의 신분은 부모에 의해 결정되며, 모두 동일하다. 사회적 신분이 교회 구성원의 자격을 결정할 수 없고, 교회 내 역할 특히 리더십의 자격 기준이 될 수 없다. 그루터기교회는 변화를 계속해 가고 있다. 오늘 여성 장로를 세움으로써 한 걸음 더 진전한다. 이 때에 적절한 은혜를 내리신 하나님께 감사하며, 앞으로도 시의적절하게 그루터기교회를 변화시켜 가실 주님께 우리를 온전히 내어드린다.

201115 창세기(18) 가인이 두려워한 사람들은 누구일까? (창 4:13-24)

[설교요약]
가인은 다른 사람들이 자신을 죽일까 두려워한다. 그러나 그 시점에 사람은 아담, 하와, 가인, 세 명뿐이지 않았나? 우리가 성경의 사람들과 다른 전제를 가지고 읽기 때문에 이 점이 문제시 되는 것이다. 그것은 역사적 사실성의 전제인데, 이 전제는 내재의 한계 속에 있다. 그러나 에덴 동산은 내재를 초월한 시공간이다. 창세기에는 창조가 종말의 전망과 연결되어 있다. 창조 이야기는 단순한 과거의 이야기가 아니라 오늘의 이야기이자 내일의 이야기이며, 그 이야기 속의 인물과 사건들은 인류 역사를 대표하는 원형이다. 그 이야기는 죄의 지배가 사람들 사이에서 어떻게 확산되는지를 보여준다.

201108 창세기(17) 죄를 다스리라 (창 4:1-16)

실낙원 이후 우리는 두 가지 방법 곧 예배와 윤리적 삶으로 하나님의 은혜에 응답한다. 가인은 그 두 가지에 모두 실패했다. 이 이야기에 “죄”가 창세기에서 처음으로 등장한다. 죄는 우리를 지배하려 한다. 죄를 다스려야 한다. 그러나 가인은 죄의 지배에 굴복하고 말았다. 그럴 수도 있다. 회개하고 다음에 잘하면 된다. 그러나 가인은 반복된 하나님의 손길을 뿌리쳤다. 그 결과 그는 그의 존재의 근원인 땅으로부터 추방되었고, 보복의 두려움 속에 살게 되었다. 그러나 하나님은 보복의 악순환을 끊으신다. 하나님은 변함없이 신실하신 분이시다. 우리도 예배와 삶으로 그분께 신실함을 다하자.

200503 산상수훈(25) 복되다(마 5:3-12)

[설교요약] 시에는 생략의 미학이 담겨 있다. 열 마디로 할 것을 두 세 마디로 함축해 내는 것이 시이다. 그래서 시를 읽을 때는 생략된 정보를 다시 채워 넣어야 한다. 그 정보들은 올바른 맥락에 놓일 때 가장 적절히 채워질 수 있다. 한 편의 시인 팔복선언은 산상수훈의 맥락에서 읽어야 한다. 그렇게 읽을 때 팔복선언에 등장하는 여덟 부류의 사람들은 하나님 나라 윤리의 이상적 모델인 완전한 사람(마 5:48)을 보여준다. 그들은 가난과 굶주림과 박해와 슬픔을 신앙의 계기로 승화시킨다. 그리고 그들의 온유함과 긍휼과 깨끗한 마음과 평화의 실천은 하나님이 일하시기 좋은 토양을 제공한다. 그들이 바로 어린이와 같은 존재들이다. 하나님 나라가 이런 자들의 것이다(마 19:14).

200426 산상수훈(24) 행위의 반석(마 7:24-27)

[설교요약] 본문은 산상수훈 결론의 마지막 문단으로서 예수님이 말씀을 듣고 행하는 것이 종말의 구원과 필연적으로 관련되어 있음을 강조한다. 반석은 예수의 말씀이다. 그리고 반석 위에 집을 짓는 것은 말씀을 따라 행하는 것이다. 모래 위에 집을 짓는 것은 예수가 아닌 다른 것, 욕망을 따라 행하는 것이다. 비유의 이슈는 행하느냐 행하지 않느냐가 아니라 무엇을 따라 행하느냐이다. 우리의 현실에서 보이는 것은 모래 뿐이고 다른 사람들은 모두 모래 위에 높고 아름다운 집을 빠른 속도로 세우고 있는 것처럼 느껴진다. 그러한 현실에서 비록 더디더라도 예수의 말씀 위에 튼튼한 집을 세우자.

주일 예배 안내

2024년 4월 28일 오전 11시

설교자: 안용성 목사

본문:   골로새서 1:15-20

제목:   거룩한 공교회